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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유럽에서 바둑은 승부 아닌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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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바둑]

- 프랑스서 보급 중인 황인성 인터뷰

佛 연맹 사범·인터넷 강의 활약

딸 이름 딴 대회 私費 들여 개최 "펀드 조성해 꿈나무 키우는 게 꿈"

현재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바둑인을 꼽는다면 아마도 황인성(35)일 것이다. 프랑스 바둑연맹 사범으로 활동하면서 매주 25개 초등학교를 돌며 '바둑 선생님'들과 지역 영재들을 지도한다. 또2011년 문을 연 인터넷 강의 사이트 '연구생 도장'은 미주까지 소문이 퍼져 양쪽 수강생 합계가 150명을 넘어섰다. 아내 이세미(33)씨와 함께 일시 귀국한 황인성을 지난주 만났다.

"승부 결과만 따지는 동양권과 달리 유럽인들은 대국을 '예술 행위'로 여겨요. 바둑판이란 도화지 위에 두 사람이 함께 아름다움을 구현해 가는 과정이란 거죠," 황인성은 지난해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했을 때 프랑스 바둑 사회엔 "설혹 인간이 인공지능에 밀려나더라도 예술을 향유하는 인간의 권리까지 기계가 빼앗아갈 수는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면서, "올라가기 위한 삶보다 넓어지기 위한 삶을 추구하는 유럽인들의 의식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조선일보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 신분으로 유럽 바둑계를 장악해가고 있는 황인성. 유럽 최고수 계보를 이어가면서 교육 등 보급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성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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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성은 중국 출신 프랑스 국적 기사 판후이(樊麾·36)와 매우 가깝다. 지난해 이세돌과 겨루기 전의 알파고 스파링 상대였던 판후이는 황인성과 프랑스 바둑협회서 잠시 함께 몸담았을 때 "우리 둘이 노조를 만들자"며 농담을 건네올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판후이는 2003년부터 10년가량 유럽선수권을 독식했고,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황인성이 3년째 유럽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황인성은 지난 2월 그르노블에서 제1회 엘리컵 바둑대회를 개최했다. 엘리는 작년 8월 태어난 자신의 딸 이름이다. 우리 돈 500만원 정도 사비(私費)가 들어갔다. "유럽에서 많은 사람에게 항상 도움만 받아왔거든요, 뭔가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생각을 늘 하다 대회를 열었죠." 유럽 프로기사 2명 등 현지 최고수 80여 명이 참가한 대성황 속에 한국 바둑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황인성의 실력은 독보적이다. 그간 유럽 내 각종 대회에 50여 번 출전해 32번 우승했을 정도. 한스 피치�카타린 타라누�판후이로 내려온 유럽 1인자 계보를 황인성이 잇고 있다. 충암고와 명지대 바둑학과를 거치기 전 6년간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홍맑은샘, 하성봉 등과 함께 연마한 실력이다. 2005년 독일서 첫 1년을 보낸 뒤 군복무로 귀국했다가 2009년부터 독일·스위스·네덜란드·영국을 거쳐 프랑스 그르노블에 정착했다.

유럽 전역에서 1년에 무려 500개, 프랑스만도 60여 개 바둑대회가 열린다. "처음 몇 년간은 무조건 이기려고만 했어요. 용돈이 궁하기도 했거니와 성적을 내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황인성은 어느날 자신이 유럽 지역 단골 출전자들의 '밥그릇'을 빼앗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특히 동구권 기사들에게 상금은 생활비의 전부에 가까울 만큼 절실한 목표물이었다.

그는 그 후부터 토너먼트 출전을 대폭 줄이고 바둑 교육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원봉사자인 각종 대회 진행요원과 방과 후 수업 교사 육성에 주력하게 된 배경이다. "바둑을 예술로 대접받게 만들어주는 분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습니다. 그들 앞에 설 때마다 내겐 강의가 '예술'이란 생각으로 임하고 있어요." 황인성은 펀드(기금)를 조성, 바둑 쿠폰 등을 통해 어린 꿈나무들에게 리그를 만들어주는 플랜도 구상 중이다.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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