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IF] 전 세계 8곳 전파망원경 동시 가동… 지구가 하나 돼 '블랙홀'을 찍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사건지평선 망원경' 프로젝트 실행

8곳의 망원경 네트워크 연결하면 달에 있는 골프공도 볼 수 있어

한쪽이 더 밝은 '초승달' 모양의 블랙홀 가장자리 볼 수 있을 듯

처리할 데이터만 2000兆 바이트 빨라야 내년 초 최종결과 나와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5~14일 미국과 유럽·일본·한국 등의 천문학자들이 블랙홀의 실제 모습을 보기 위해 뭉쳤다. 바로 '사건지평선 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EHT)' 프로젝트다. 사건지평선은 블랙홀의 안팎을 연결하는 지대이다. 어떤 물질이라도 심지어 빛조차도 사건지평선 안쪽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중력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물질이 사건지평선을 지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때 일부는 에너지로 방출된다. 과학자들은 전 세계의 전파망원경을 하나로 연결해 블랙홀 사건지평선의 가장자리를 보려고 시도했다.

관측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방울은 우주에서 온 전파를 흡수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관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 세계가 동시에 맑은 날이 돼야 관측이 가능하다. 하늘이 도왔는지 이번에 5일간 전파망원경이 있는 전 세계 8곳이 모두 맑았다. 관측이 끝난 후 과학자들이 "50년산 스카치위스키 병을 따겠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승리의 찬가를 듣겠다"며 기뻐할 정도였다.

◇지구만 한 크기의 전파망원경 구축

과학자들은 1970년대부터 은하 중심부에서 이상한 전파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전파는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훨씬 길어 먼 우주를 지나 지구까지 올 수 있다. 2002년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과학자들은 지구로부터 2만600년 광년(1광년은 빛이 1년 가는 거리, 약 9조4600억㎞) 떨어진 우리은하 중심의 별자리 궁수자리에서 태양 질량 450만배의 블랙홀을 발견했다. 궁수자리 방향의 초대형 블랙홀이라는 의미로 *를 붙여 '궁수자리 A*'라고 부른다. EHT가 관측하려는 블랙홀이 바로 궁수자리 A*이다.

조선일보

천체망원경의 해상도는 렌즈의 구경에 비례한다. 과학자들은 먼 우주에 있는 블랙홀에서 나온 전파가 지구까지 도달하려면 파장이 1.3㎜ 정도여야 한다고 계산했다. 이 파장대의 전파를 보려면 망원경의 지름이 지구만 해야 한다. EHT는 전 세계에 흩어진 전파망원경을 동시에 가동해 지구만 한 망원경과 같은 효과를 내려고 하는 것이다.

사건지평선은 블랙홀의 질량이 커질수록 커진다. 처녀자리 은하단 중심에는 태양 질량의 66억배에 달하는 엄청난 질량을 가진 초대형 블랙홀이 확인됐다. 바로 M87*이다. 이 천체는 지구로부터 5300만 광년 떨어져 있지만, 블랙홀의 질량이 워낙 무겁기 때문에 블랙홀 중심에서 사건지평선까지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도 크다. 덕분에 이 역시 EHT로 사건지평선 부근의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대상이다.

◇얼굴에 뒤통수까지 보이는 블랙홀

블랙홀은 아직까지 직접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간접적인 중력 효과로 실체를 추정하고 있다. 2015년 9월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가 이끄는 라이고 연구단은 블랙홀 두 개가 융합되면서 발생한 중력파를 처음으로 검출했다.

또 은하 중심부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물질의 분출 현상인 제트(jet)도 블랙홀의 증거가 된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물질은 '강착원반(accretion disk)'을 형성하고, 중심으로 갈수록 속도가 빛에 가깝게 가속된다. 결국 지구에 유성이 떨어질 때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듯 마찰력에 의해 수백만도의 엄청난 열이 발생하고, 여기서 발생한 강력한 자기장에 의해 원반의 수직방향으로 물질이 분출되는 제트가 발생한다.

EHT는 두 블랙홀의 특이한 모습을 직접 관측하려고 한다. 토성을 둘러싼 고리는 앞쪽이 보이고 뒤쪽은 토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블랙홀에서는 뒤도 보인다. 블랙홀에서는 중력이 워낙 강해 시공간이 휘어진다. 이로 인해 뒤쪽의 빛도 앞으로 휘어져 나온다. 사람으로 치면 사진에 얼굴과 뒤통수가 동시에 보이는 식이다.

두 번째 특이 현상은 블랙홀이 일정한 형태가 아니라 한쪽이 더 밝은 초승달 모양이 되는 것이다. 사건지평선에 다가간 물질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공전하며 블랙홀로 끌려 들어간다. 이렇게 회전하는 원반 중 관측자를 향해 움직이는 모서리가 관측자에게서 멀어지는 모서리보다 밝게 보인다. 결과적으로 블랙홀은 밝기가 일정한 고리 모양이 아니라 한쪽이 밝게 빛나는 보석이 박힌 반지와 같은 형태가 된다. 이번 관측 결과가 시뮬레이션과 같으면 시공간의 뒤틀림을 예견한 일반상대성이론과 초대형 블랙홀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달의 골프공 볼 수 있는 해상도 구현

EHT는 개별 전파망원경으로는 불가능한 분해능을 구현했다. 단일 전파망원경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 분해능은 약 6도다. 즉 두 물체가 이만큼 각도로 떨어져 있을 때 구분이 가능하다. EHT는 분해능이 100만 분의 1도로 600만배 가량 높아졌다. 이를테면 달에 있는 골프공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이다.

데이터양도 역대 최고다. EHT는 하루 관측에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입자가속기에서 나오는 1년치 데이터만큼의 정보가 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전체 데이터 규모는 2페타바이트(2000조바이트). 이 정도면 MP3 플레이어로 4000년 동안 반복 없이 노래를 재생할 수 있다. 데이터양이 워낙 커 인터넷으로는 전송이 안 되고 1024개의 하드드라이브에 담아 미국 MIT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로 보낸다. 대부분 2주면 데이터를 다 회수할 수 있지만 남극 관측정보는 기상 문제로 6개월 뒤에야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천문대(EAO) 일원인 한국천문연구원은 이번에 칠레와 미국 하와이의 전파망원경을 통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다. 또 이번 관측과 별개로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과 한일전파관측망(KaVA)을 가동해 다른 전파 파장 대역에서 두 블랙홀 사건지평선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제트 사건을 집중적으로 관측했다.

남극 망원경을 제외한 망원경들의 영상 합성 결과는 올 늦여름부터 검토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최종 결과는 이르면 내년 초에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만약 블랙홀이 그동안 예측한 모습과 다르다 해도 우주의 탄생과 진화의 비밀을 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은 틀림이 없다.

[손봉원 한국천문연구원 전파천문본부 선임연구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