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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IF] 맡은 일 없이… 놀고먹는 유전자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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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연구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아무 영향 없는 유전자 1317개 발견

과학자들은 개별 유전자의 기능을 밝히기 위해 '녹아웃(knockout)'이라는 실험 기법을 사용한다. 쥐나 토끼 같은 동물에서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하고 어떤 일이 생기는지 살펴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는 인위적인 녹아웃이 불가능하다. 유전자를 녹아웃시키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 과학자들이 사람을 대상으로 녹아웃 실험을 통해 유전자의 기능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조선일보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인간을 실험 목적으로 무제한 복제할 수 있다면 유전자 연구가 훨씬 빨라지겠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대신 과학자들은 특정 유전자가 원래부터 없는 사람들을 찾아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고 있다. /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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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유전자 1317개 발견

미국 브로드연구소는 지난 12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1만500명의 파키스탄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사람의 유전자 중 특별한 기능이 없는 1317개의 유전자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사람의 유전자를 직접 녹아웃시키는 대신 선천적으로 특정한 유전자가 없는 사람들을 찾았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유전자가 없는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면 그 유전자는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팀이 파키스탄인에 주목한 것은 파키스탄에 사촌끼리 결혼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유전자가 없는 사람이 그 유전자가 있는 사람과 결혼하면 자녀는 유전자가 있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부모가 모두 유전자가 없는 경우에는 선천적으로 유전자가 녹아웃된 자녀가 태어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친척끼리의 근친혼은 이런 녹아웃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연구를 이끈 세카 캐서레산 박사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 이미 밝혀져 있는 1만8000개의 사람 유전자와 파키스탄인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비교해 유전자가 녹아웃된 사람들을 찾아냈다"면서 "이들의 혈액을 다시 분석해 특정 유전자의 유무가 콜레스테롤이나 대사 능력 등 200가지의 지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폈다"고 말했다.

분석 결과, 파키스탄 사람들에서 녹아웃된 것으로 드러난 유전자 1317개는 최소한 의학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여러 유전자가 동시에 없는 사람들에서는 인슐린의 혈중농도가 저하되는 등의 문제가 발견됐다.

이번 실험에서는 질병 치료와 신약 개발에 대한 단서들도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대형 제약사들은 중성지방에 대한 대사 능력을 조절하는 단백질인 'ApoC-Ⅲ'를 타깃으로 한 심장병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APOC3 유전자의 작용을 약물로 차단해 고지혈증을 일으키는 중성지방이 쌓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APOC3 유전자가 없는 파키스탄인 부모와 자녀 9명을 발견했다. 이들은 지방으로 가득한 밀크셰이크를 먹어도 혈중 지방 농도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APOC3 유전자의 작용을 차단하면 심장질환을 막을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연구팀은 이 밖에도 동맥 석회화나 당뇨와 관련된 질환 치료제가 타깃으로 하고 있는 각종 약물의 효과도 특정 유전자가 없는 사람들을 통해 밝혀냈다. 보통 약물 개발부터 임상시험을 통해 약물의 효과를 입증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전이다.

인간 녹아웃 프로젝트 꿈꾸는 과학자들

영국 퀸메리대 데이비드 반 힐 박사는 "20만명 정도의 파키스탄인으로 대상을 확대하면 필요없는 녹아웃 유전자 숫자가 8700개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람의 유전자 3분의 1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고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꼭 기능을 밝혀야 할 유전자의 숫자는 계속 줄어든다.

현재 인간 녹아웃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곳은 브로드연구소뿐만은 아니다. 미국 MIT대 연구팀은 9만명을 대상으로 녹아웃 유전자를 조사했고, 아이슬란드에서도 대규모 녹아웃 유전자 조사가 이뤄졌다. 아이슬란드는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전자 녹아웃이 잘 보존되는 특성이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 녹아웃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다.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연구들을 하나로 통합해 신약 개발과 질병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처는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지면 특정 유전자가 없는 사람들을 임상시험에 참여시켜 효과를 미리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건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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