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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Why] 한국 밖은 한겨울, 한국만 온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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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명랑笑說]

한반도 위기 상황, 정작 우리는 역할 없어

대선주자들 "전쟁 안 돼"… 北·中·美 포복절도할 일, 말로 원한다고 평화 안와

원전 사고를 다룬 영화 '판도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아이들에게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물려줄래, 아니면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을 물려줄래?" 자식 키우는 부모 처지에서야 당연히 후자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헬조선이라는데 안전하기라도 해야지. 그런데 이 논리, 실은 교묘한 말장난이다. 잘 먹고 잘사는 세상과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은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은 대부분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기반으로 하는 게 보통이다. 반대의 경우? 못 먹고 못사는데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 같은 건 없다. 동남아 가보시면 알 거다. 거리 뒷골목을 마음대로 밤에 나다닐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수도꼭지 틀면 아무 때나 더운물 나오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꼼꼼히 듣지 않으면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이런 환경주의, 좌파적 선동은 귀여운 편이다. 한동안 아무리 나쁜 평화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논리가 세상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평화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다. 같이 놓고 골라 봐요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얼마 전 대선 후보들이 TV 토론에 나와 한반도 최근 상황을 놓고 합창했다. "일방적 선제 타격 안 돼." "군사 행동 안 돼." "전쟁 절대 안 돼." 하하하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쏘겠다는 것은 북한이다. 선제 타격하겠다는 것은 미국이다. 말리든 방치하든 하는 건 중국 몫이다. 슬프게도 우리 역할은 없다(얻어터지는 것도 역할에 들어간다면 아주 없지는 않겠다). 장담컨대 이 토론회 영상 보여주면 세 나라 모두 그 자리에서 포복하고 절도한 끝에 졸도할 것이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게 전쟁이 아니고 말로 원한다고 평화가 오는 게 아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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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가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일 때 이야기다. 아테네 남쪽으로 밀로스라는 섬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밀로의 비너스로 알려진 그 섬이다. 밀로스 섬은 아테네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였다. 아테네는 동맹군을 이끌고 밀로스 섬을 포위한다. 항복을 권유하면서 아테네인들은 이렇게 운을 뗀다. "여러분이 눈앞의 현실에 근거하여 여러분의 도시를 구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장래에 관해 제멋대로 억측을 늘어놓기 위해 우리를 만난 것이라면 우리는 회담을 중단할 것이오." 그러나 밀로스인들은 과다하게 순수했고 비정상적으로 순진했다. 그들은 아테네인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자기들을 중립국으로,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기들 나라를 떠나달라고. 그러나 '장래에 관해 제멋대로 억측을 늘어놓은' 결과는 참혹했다. 성인 남자는 모조리 참살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흘러간 역사가 아니다. 국제 정치에서 약자가 부르짖는 정의가 조소와 조롱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은 그 후 2500년 내내 반복됐다. 소생이 보는 대한민국은 거대한 온실이다. 밖에서는 한파와 세풍이 몰아치는데 그 안은 사시사철 봄날이다. 그 봄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우리는 살고 있다.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런 말을 했다. "방어만 하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대왕에게 묻고 싶다. "폐하, 그럼 방어도 안 되는 나라는요?" 아마 이런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나라가 아님."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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