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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꽃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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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봄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꽃은 피었다 싶으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이 피고 진다”라고 탄생과 소멸의 의미를 이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지난주 내내 벚꽃 잎들이 눈송이처럼 날렸습니다. 무정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갈 곳 없이 소실되는 꽃잎들은 정작으로 고와서 서럽습니다. ‘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조지훈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둔감해진 현대의 도시민들도 피고 지는 꽃들 앞에선 무심할 수 없습니다. 19세기 후반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웠던 도시의 탐미주의자들은 자연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수정하고 변형해서 탄생시키는 미(美)의 개념을 전개했습니다. 예술적인, 곧 인공적인 삶의 환경에 집착했던 탐미주의자들의 작업에서 자연은 부정되고 소외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대상 중에서도 꽃만은 예외였습니다. 아니 탐미주의자들은 오히려 자연 상태의 꽃 그 자체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가 꽃에 스며들어 있는 연약함과 쇠락(d´ecadence)의 느낌, 삶에서 죽음으로의 빠른 이행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탐미주의자들의 데카당스한 감수성에 상응하는 것이었지요.

탄생과 소멸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듯한 꽃의 삶은 그 자체로 존재의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거역하고 싶지만 거역할 수 없는 한계, 그 모순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의 화려함은 비극적입니다. 비극의 미학은 우리에게 한계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 줍니다. 감히 모순을 포용하게 합니다. 젊은 날 이형기 시인이 ‘낙화(落花)’를 보며 단호히 읊었듯이 말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꽃잎이 지는 어느 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시인의 말처럼 비극적이지만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카를 야스퍼스는 비극적인 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것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비극은 삶의 덧없음을 단순히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근본적이고 포괄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암호입니다.

우주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작가 올라프 스테이플던은 인류 진화의 거시적 차원에서 다른 행성에 거주하게 될 먼 미래의 후손들을 매우 역설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류의 가상적 후손들이 짧은 생명과 존재의 비극성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종교의 형태 또는 예술적 창조물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곧 ‘단명 숭배(Cult of Evanescence)’ 또는 ‘소실에 대한 예찬’을 지고의 가치로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섬뜩하기까지 한 상상이지요. 하지만 이 별난 ‘컬트’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보면 이 역설적 상상의 진의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일찍 소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또한 ‘삶의 생기를 되찾게 하기’ 위해서 창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봄날 다정다감하게 자연을 관조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별난 컬트가 굳이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낙화의 ‘비극적 기품’이 탄생과 소멸의 은밀한 암호를 사색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삶의 생기를 되찾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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