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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해외 CEO 인터뷰] 강남 아파트 4채 값 스톡옵션 포기 모험 … 디지털화로 법정관리 위기 회사 되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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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패션 브랜드 한국계 CEO

돈보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한다 생각

버버리 수석부사장으로 일하다 옮겨

모든 부서에 디지털 우선 강조

샘플책 대신 동영상 보고 매장 진열

오프라인·온라인 연계해 판매 늘려

시시각각 환경 변화에 신속 대응

디지털에 투자 땐 돈 못 번다는 건 오해

전통 방식 디지털화하면 이익 늘어나

영국 패션 브랜드 ‘올세인츠’ 최고경영자 윌리엄 김
영국 패션 브랜드 올세인츠는 6년 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1994년 론칭해 고급스러운 소재와 디자인에 합리적인 가격을 앞세워 한때 미국과 유럽, 러시아까지 진출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어려움에 처했다. 무리한 투자와 확장이 화근이었다. 2011년 이 회사는 910만 파운드(약 127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법정관리 문턱까지 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브랜드 잠재력을 알아본 투자회사 라이언캐피털이 올세인츠를 인수하면서 기사회생했다. 라이언캐피털의 린든 리 회장은 브랜드를 소생시킬 적임자를 백방으로 물색한 끝에 버버리 영국 본사에서 수석부사장으로 일하던 윌리엄 김을 낙점했다.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2012년 올세인츠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윌리엄 김은 이듬해 회사를 흑자로 돌려세웠다.

중앙일보

영국 패션 브랜드 올세인츠의 윌리엄 김 최고경영자(CEO)는 진정한 코즈모폴리턴이다. 미국에서 7년간 일했고 한국·홍콩 등 아시아에서 8년, 영국·이탈리아를 포함해 유럽에서 10년을 근무했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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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세인츠는 이후 해마다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2015년에는 2014년 대비 9% 성장한 2억5200만 파운드(약 3519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세계적인 불경기에도 17.7% 성장한 2850만 파운드(약 398억원)였다. 비결이 뭘까. 회사를 디지털 기반으로 전환한 게 주효했다. 최근 방한한 김 CEO를 만났다. 재미교포인 그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 가운데 거의 유일한 한국계 경영자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Q : 올세인츠는 버버리보다 덜 알려진 회사다. CEO직을 수락한 이유는.



A : “당시 버버리에서 디지털 전략을 맡고 있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명품 브랜드들은 전통과 헤리티지를 핑계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영업 방식을 고수했다. 버버리는 그나마 디지털화에서 가장 앞서갔음에도 디지털 기획안은 승인보다 부결이 더 많았다. 디지털 세계는 남보다 빨리 움직이면 적은 자본으로도 기회를 얻을 수 있는데, 명품 브랜드에서 시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올세인츠를 포함해 3개 브랜드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Q : 거액의 버버리 스톡옵션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A : “버버리를 떠나면서 스톡옵션도 포기해야 했다. 액수는 밝힐 수 없다. 에둘러 말하자면 강남 아파트 4채쯤 되는 금액이었다. 부도 직전의 회사로 옮기겠다고 하니 버버리 인사팀에서는 세 번을 불러 내 의사를 확인했다. 나는 인생은 돈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중앙일보

올세인츠 여성복 대표상품인 발펀 워시드 핑크 레더 바이커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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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명품 브랜드의 미래를 비관했나.



A : “명품 브랜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베이비부머가 주요 고객이다. 그런데 2020년이 되면 밀레니얼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가 베이비부머보다 숫자가 많아진다. 패션위크, 백화점 바이어, 패션 매거진 등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명품 브랜드 시스템이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Q : 법정관리 직전까지 갔으면 회사 상태가 엉망이었을 텐데.



A : “처음 출근한 날을 잊을 수 없다. 본사 건물에 도착했는데, 출입구를 찾지 못해 헤맸다. 입구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매장도 서비스 개념이 없었다. 시내 아웃렛과 온라인 매장을 닫고, 이미지에 안 맞는 상품부터 정리했다. 매장에서는 손님 맞이하는 법부터 다시 교육했다. 상품을 제작하는 협력업체가 100개가 넘었는데, 이를 30개로 줄이니 품질이 좋아졌다.”




Q : 디지털화 작업은 무엇부터 시작했나.



A : “디지털화는 온라인몰에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비효율을 어떤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느냐의 문제다. 이걸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라고 부른다. 큰돈을 들여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사는 것도 아니요, 특정 부서만의 일도 아니다.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는 건 돈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려 리스크가 크다. 대신 일하는 방식, 사고의 흐름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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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세인츠 남성복 대표 상품인 카하와 블랙 레더 바이커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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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A : “아무리 뛰어난 디지털 전략을 제시해도 담당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무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브랜드다. 모든 부서에서 디지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새 상품을 진열하려면 사진을 촬영해 샘플책을 만들어 매장에 보내면 그 두꺼운 매뉴얼을 읽고 실행했다. 본사 전문 인력이 매장을 방문해 점검하고,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잘못을 지적했다. 지금은 회사 내 비디오팀이 동영상을 제작해 세계 매장에 뿌리면 24시간 안에 교체가 완료된다. 신규 충원 없이 전문 인력 7명만으로 25개국 250개 매장을 커버하고 있다.”




Q : 경영 성과에는 어떻게 반영됐나.



A : “과거에는 날씨 같은 환경 변화에 대응이 느렸다. 지금은 두꺼운 아우터를 진열해 놨는데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면 새 진열 방식을 금세 전파할 수 있게 됐다. 시시각각 변화에 대응할 수 있으니 매출이 오른다. 기후 여건이 전혀 다른 나라에서는 나름대로 꾸민 매장 사진을 찍어 모두 볼 수 있게 올린다. 선의의 경쟁이 생긴 것이다. 특히 직원들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게 가장 큰 수확이다. 요즘은 날씨, 테러 등 비즈니스 환경이 워낙 역동적이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최고의 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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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이익률이 많이 올랐는데.



A : “이익률이 가장 높은 올세인츠닷컴을 강화한 덕분이다. 온라인 판매 비중이 전체 매출액의 20%다. 명품 브랜드는 평균적으로 5~7%쯤, 컨템퍼러리 의류 브랜드는 1~2%인 데 비해 월등히 높다.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몰의 재고를 함께 관리하도록 혁신적인 재고 관리 플랫폼을 만들었다. 온라인에서 상품이 모두 팔리면 선별한 65개 매장에 물량을 공급하라고 메시지가 뜬다. 매장이 물류창고 역할을 한다. 2곳밖에 없던 물류센터가 67곳으로 늘어난 셈이다. 온라인에서는 물건이 없어 못 팔고, 매장은 손님이 없어 놀고 있는 비효율이 해소됐다.”




Q : 직원들에게 어떻게 동기 부여를 했나.



A : “우수한 인력은 인사 관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링크드인에 올려 공개적으로 칭찬한다. 상당한 동기 부여가 되는 것 같다. 그걸 출력해 부모님께 보내는 사람도 있다. 피드백 체계가 매우 중요하다. 주변에서는 경쟁 업체가 일 잘하는 직원을 빼 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걱정했다. 아직까지 리스트에 올라간 사람 중 한 명도 떠나지 않았다.”




Q : 1년 만에 흑자 전환한 이후 이어진 흑자 행진 비결은.



A : “자본 투자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 이익을 많이 내고, 그걸로 다시 투자한다. 디지털에 투자하면 돈을 못 번다는 오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전통 방식으로 운영되던 회사가 디자인 사고를 통해 조금씩 변해 가면 이익은 늘어나고 일하는 환경은 더 좋아진다.”




Q : 회계학을 전공했는데 패션계에서 일하고 있다.



A : “미국계 회계법인 한국지사에서 일할 때 외환위기가 닥쳤다. 당시 국내 기업이 운영하던 구찌를 본사가 다시 직영하는 체제로 바꾸는 일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구찌 본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 명품과 인연을 맺었다. 구찌그룹에서 스텔라 매카트니, 알렉산더 매퀸 등 신생 브랜드를 키우는 업무를 했다.”




Q : 한국 패션 브랜드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A : “한국 음악·영화·음식·화장품이 해외에서 인기다. 패션도 충분한 기회가 있다고 본다. 진출하고자 하는 시장의 고객 취향을 존중하는 게 제1원칙이다. 나는 취임 후 한동안 영국인 평균 몸 사이즈 마네킹을 사무실에 두고 보면서 일했다.”
[S BOX] 윌리엄 김이 말하는 글로벌 기업서 성공 위한 5계명
윌리엄 김 올세인츠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할머니와 큰아버지 식구까지 대가족이 이민한 덕분에 콜로라도주에 살면서도 텃밭에서 고추를 따 김장을 하고, 수제비를 먹으며 자랐다.

콜로라도대(회계학)를 졸업한 뒤 회계법인 쿠퍼스앤드라이브런드 한국지사와 버버리 아시아에서 근무해 한국 사정에도 밝다. 글로벌 패션·명품 업계에서 보기 드문 한국계 경영자인 그는 “아시아 고객이 명품 브랜드 매출의 절반 정도를 기여하는데도 회사 고위직에 아시아계가 없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글로벌 기업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윌리엄 김이 들려주는 팁 다섯 가지다.

1. 언어가 아니라 문화를 배워라=언어를 공부하고 익혀서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기본이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건 그 나라 문화를 포용하는 것이다. 뉴스를 읽고 역사를 공부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연결 지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의 생활 방식과 관심사, 삶의 철학까지 깊이 파고들어 그 나라 문화의 모든 면을 공유하라.

2.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한국인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에 너무 충실하다. 많이 알수록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배운다. 하지만 영미권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어느 정도 자신감 있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의견을 내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정받기 어렵다. 아는 게 없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3. 투명하게 소통하라=글로벌 기업과 한국 기업의 가장 큰 문화 차이는 소통 방식이다. 전체 회의 또는 일대일 미팅에서조차 의견을 솔직히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아무 얘기 없다가 회의가 끝난 뒤에 반대의사를 밝히거나 그제야 생각을 말하는 걸 봤다. 이는 미팅의 목적을 무효화하고, 회사 전체의 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다른 의견도 환영받는다는 걸 기억하라.

4. 고향 생각은 잊어라=언어 소통에 문제가 없어도 해외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영어도 잘하고 실력도 좋은 사람이 기업 본사나 아시아 지사로 파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봤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새로운 문화를 보고 배우는 데 흥미를 가지면 고향에 대한 향수도 줄어든다.

5. 동료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글로벌 기업에는 회식 대신 파티가 있다. 이런 모임에서는 목표를 정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른 국가·부문 소속원들과 친분을 쌓는 기회로 삼아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화제 몇 가지를 준비하면 도움이 된다. 소소한 파티, 스몰 토크(가벼운 대화) 등 업무 외에 동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박현영 기자 park.hy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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