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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키운 날씬한 돼지고기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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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어회처럼 살이 탱탱.. 경북 봉화 '땅파는 까망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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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파는 까망돼지’의 여러 부위 고기. 육색이 확연히 짙다. 무리해서 살을 찌우지 않아 삼겹살조차 비계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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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차를 달려 해가 다 뜨고야 경북 봉화군에 닿았다. 커다란 소백산과 태백산, 그리고 청량산의 산세가 만나는 이 지역은 두메산골이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다. 봉화 읍내에서도 또 한참을 구비구비 좁은 도로를 달리고 난 뒤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돼지가 사는 곳이었다.

구수한 막걸리 향 풍기는 돼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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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을 떼지 않은 어린 돼지들이 온열 전등 아래 땅을 파내고 들어가 서로 몸을 붙인 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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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일ㆍ이혜영씨의 분천농장에는 대략 50마리의 돼지가 살고 있었다. 다섯 농가가 힘을 합친 ‘땅파는 까망돼지’ 농장 중 하나다. 70평 남짓한 돈사에 다가가자 먼지가 날아다녔다. 사면이 뻥 뚫린 돈사라,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통에 혀가 온통 까끌거렸지만, 먼지의 향은 도시의 매캐한 그것과 달리 먹어도 될 것처럼 고소했다. 도시의 광물성 먼지와는 영 다르다. 돈사 바닥에 두툼하게 깔아둔 흙, 톱밥이나 쌀겨 등에서 나온 유기물 먼지다. 돼지 집의 융단이 푹신하게 쌓인 채로 자연스럽게 발효되어 구수한 향이 풍긴다. 발효된 곡물의 향, 그리고 흐릿한 과일 향 같은 것도 났다. 막걸리 향 같다.

돼지들은 발로 푹신한 바닥을 파헤치고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거나 늘어지게 누워 잤다. 돼지는 땅을 파고 들어앉아 추위나 더위로부터 체온을 지키는 본성을 갖고 있다. 아직 젖을 못 뗀 새끼 돼지들이 있는 칸에 작은 온열 전등이 매달려 있는 것 빼고는 돈사 어디에도 난방기구는 보이지 않았다. 돼지들은 겨울 추위를 스스로 견뎠다. 이 농장 돼지 집안은 스스로 계절과 온도를 견디는 훈련이 돼 있다. 냉ㆍ난방이 갖춰진 시설에 사는 돼지들보다 추위나 더위에 강하다. 바닥에서 발효가 일어나며 얼마간의 열도 발생하기 때문에 땅을 파고 모여 앉아 있으면 겨울 추위도 견딜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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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간식으로 던져준 쑥을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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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집에 깔린 식물성 융단은 먹이가 되기도 한다. 땅을 파고 그 안의 식물 뿌리나 지렁이를 찾아 먹기도 하는 돼지의 습성대로다. 돼지들은 ‘채식 습관’을 지키고 있다. 땅 파는 까망돼지 농장에서는 잔반을 포함해 동물성 사료를 전혀 주지 않는다. 제품화한 사료를 사다 먹이지도 않는다. 정미소에서 얻어 온 쌀겨, 방앗간에서 가져온 깻묵, 사과즙을 짜고 남은 건더기, 상품성 없는 토마토나 사과며 채소, 밭에서 난 건초 등 주변 농가에서 나온 식물성 재료를 뒤섞어 발효시킨 것이 돼지들의 주식이다. 산이며 들이 푸르러지기 시작하면 쑥, 명아주, 칡 덩굴 같은 온갖 풀을 베어다 먹이고, 가을로 접어들면 낙엽을 긁어다 나르기도 한다. 고기 반찬 없이도 돼지같이 잘 먹는다. 돼지는 그런 동물이니까.

축산농가에선 악취와 분변 폐기물이 골칫거리인데, 이 농가에는 해당 없는 이야기다. 돈사의 칸마다 40~60일 이하 젖먹이와 그 어미, 씨돼지 ‘장군이’와 예닐곱 마리 모돈들, 5개월령, 7개월령, 10개월령짜리 돼지들이 각각 분산돼 살고 있다. 돼지 한 무리 살기에는 넓은 집이다. 돼지들에게 한쪽 융단은 먹이 겸 침대가 되고 또 한쪽은 화장실이 된다. 분변은 융단과 하나가 되어 발효를 통해 분해된다. 자연의 공기정화 시스템을 갖춘 셈이다. 정화 능력이 우수해 돈사에 바짝 다가가도 악취가 거의 없다. 100㎏에 육박한 덩치 큰 돼지들이 모여 사는 칸 앞 정도나 가야 “으이크!”하며 인상 한 번 찌푸릴 정도다. 각 농가가 목표로 하는 돼지 두 수는 100마리에 불과하다. 작아도 70평부터 크게는 200평까지, 넓은 돈사에 채 100마리도 되지 않는 돼지를 치니 주변에 폐 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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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돼지는 농부가 던져준 쑥을 배불리 먹고 잠시 드러누웠다. 땅을 파내고 눕는 것은 돼지의 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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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돼지들은 온몸이 까맣다. 갈색 털이 섞인 돼지나 온몸이 갈색 털로 덮인 돼지도 나온다. 가끔 검은 털과 갈색 털이 줄무늬로 나는 녀석도 등장한다. 까만 털은 토종 흑돼지의 유전자라고 한다. 갈색 털은 ‘듀록’의 유전자다. 줄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멧돼지의 유전자다. 세 종류 돼지를 교잡해 얻은 품종으로, 흔하지 않은 것이다. 육색이 진하고 고기 향이 확실히 나지만 웅내와는 다른 ‘고기 향’이다. 가장 흔한 돼지 품종, 요크셔와 버크셔, 랜드레이스종을 섞은 3원 교잡종 돼지는 뽀얗다. 육향이 거의 없고 빨리 크도록 교잡한 돼지다. 생산성이 높고 맛과 향도 소비자 취향에 맞췄다.

소비자가 가장 선호하는 돼지고기의 육질은 100~120㎏에서 얻을 수 있다. ‘땅파는 까망 돼지’들은 100㎏까지 크려면 10~14개월이 걸린다. 이 농장에서 태어난 돼지들은 네 계절을 ‘사람 집사’가 힘들게 구해 온 채식 식단을 배불리 먹으면서 유유자적 넓은 집에 살다가는 셈이다. 돼지는 개만큼 오래 산다. 10년, 길면 15년 이상도 산다. 그러나 사는 내내 많이 먹는다. 빨리 키워 빨리 고기를 얻어야 채산이 맞는다. 1년이나 걸려야 출하 체중에 턱걸이하는 이 집 돼지들은 6개월이면 100㎏대에 접어드는 뭇 돼지들과 다른 팔자다.

돼지 선택의 가능성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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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의 돈사는 사방이 뻥 뚫렸고 지붕은 햇빛이 통하게 돼 있다. 돼지들은 양지 바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낮잠을 잔다. 고양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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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난 일이다. 사실 돼지를 이렇게 힘들게 키울 필요가 없다. 땅파는 까망돼지 농부들이 ‘관행 양돈’이라 부르는 방식대로 키우면 세상 편하다. 수퇘지를 기구에 올려 놓고 정액을 뽑아내 암퇘지의 몸속에 집어 넣으면 새끼 돼지가 쑥쑥 나온다. 자라기 전에 치아와 꼬리를 잘라내면 돼지들끼리 싸우다 다치거나 죽지도 않는다. 빛과 어둠을 조절할 수 있도록 벽을 쌓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 우리에 꽉꽉 채워 넣고 밀집 공간에서 면역력이 약해 걱정이면 약을 먹이면 된다. 어차피 돼지는 병들어 죽기 전에 출하 시기를 맞을 확률이 더 크다. 옥수수 사료를 사다 먹이면 반 년 만에 100㎏으로 뒤룩뒤룩 자라나 출하할 수 있다.

그 쉬운 일을 굳이 어렵게 하는 땅파는 까망돼지 농부들은 2011년쯤 봉화에서 의기투합해 지난해 공동 브랜드를 만들었다. 물야농장의 이동영 유준태 농부, 법전농장의 이민우 조은영 농부, 분천농장 백승일 이혜영 농부, 그리고 정육점을 맡은 강성길 여지현 농부, 식당을 맡은 임헌문 농부가 그 주인공으로, 모두 귀농 농가다. 자연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두메산골로 파고들었다. 유별나다면 유별나다. 그러나 가치 있는 유별남이다. 비단 땅파는 까망돼지만이 유별난 농가인 것도 아니다. 기존 양돈 방식에서 벗어나 동물 복지, 순환 농법 등 별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농가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별나게 키운 돼지고기 맛을 보면 세상 수 많은 별남의 가치도 존중할 수 있다.

농촌진흥청 김영화 연구사는 돼지 맛을 이렇게 설명한다. “100을 놓고 보자면 품종이 40~50% 비중으로 맛에 영향을 크게 준다. 그 다음이 사료의 성분으로 20%가량 기여한다. 사육 밀도나 성장 속도 등 사육 환경은 20% 가량 영향이 있다. 나머지 10~20%는 개체 차다.” 땅파는 까망돼지들은 품종도 다르고, 사료도 별다른 것을 먹이고, 사육환경은 압도적으로 느긋하고 널찍하다. “속성으로 키우면 마블링이 잘 형성되지 않고 흔히 ‘물돼지’라 부르는 흐물흐물하고 전단력이 낮은 고기가 나오기 쉽다”고도 하니 가치 있는 별남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특히 이 돼지고기는 가열 시 스며 나온 지방이 실온에서 굳지 않는다. 냉장 온도에서도 크림 상태 정도로만 굳는다. 사료에 따라 돼지고기 지방의 조성이 달라질 수 있는데, 자연 채식을 고집한 돼지라 불포화지방산 비율이 높아서다. 이달 16일 열린 ‘맛 연구회 - 본성의 맛’에서 땅파는 까망돼지를 주재료로 요리를 내놓은 ‘한국술집 21세기 서울’ 윤태상 요리사는 “일반 돼지보다 짙은 빛깔이 인상적이고 수퇘지의 웅내가 아닌 고기 본연의 향이 있다”며 “탄성도 활어회처럼 탱탱하다”고 했다. 그는 “근내 지방이 많아 부드럽고, 일반적으로 수육용으로 쓰이는 사태를 구워 먹었을 때도 퍽퍽한 느낌이 적었다”고도 했다.

농부들은 다음의 다짐을 공유하고 있다. ①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내어주는 돼지를 최대한 배려하겠습니다. ②자연과 이웃에 피해가 가지 않는 작은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겠습니다. ③돼지가 본성대로 땅을 파도록 돕겠습니다. ④돼지가 자라는 우리는 최대한 여유롭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⑤신선한 짚과 풀을 충분히 넣어주어 소화를 돕겠습니다. ⑥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돼지에게 고통을 주는 꼬리와 이빨 자르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⑦오로지 살을 찌우기 위한 목적인 옥수수와 유전자 변형 곡물(GMO)을 먹이로 주지 않겠습니다. ⑧우리 수고 이상의 대가를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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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열리는 '맛 연구회'의 이번 행사는 16일 ‘본성의 맛’이라는 제목으로 땅파는 까망돼지 농가를 만났다. 안상현 한국술집 대표와 법전농장 이민우 농부, 요리사 윤태상이 한 자리에 서서 돼지고기의 또 다른 선택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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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덟 가지 생각으로 키워 낸 돼지는 소비자에게도 다짐을 요구한다. 고기를 살 때 인기 부위인 삼겹살, 목살만 고를 수 없다. 두 부위에 등심, 다릿살, 사태 등을 골고루 섞어 판다. 어느 부위나 같은 노력이 들어갔기에 같이 귀한 부위라는 생각에서다. 일반 냉장 삼겹살 가격을 떠올려보면 가격은 일반 돼지고기보다 훨씬 비싸다. ㎏당 3만원이니 보통 가격은 아니다. 누구나 선뜻 원할 돼지고기는 아니다. 다만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이런 돼지고기도 존재해야 한다. 돼지를 위해, 또는 돼지를 위하는 농부를 위해, 아니라면 취향에 맞는 맛을 위해 식재료 선택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누군가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다.

‘맛연구회 – 본성의 맛’에서 한국술집 21세기 서울 윤태상 요리사가 선보인 돼지고기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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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갖가지 식물을 먹고 자라는 돼지의 식사 시간에서 영감을 받은 내장 샐러드. 간과 허파, 심장 등을 사용했다.

②푹신한 흙바닥에서 생활하는 까만 돼지들을 형상화해 갈비살로 속을 채운 까망 만두.

③이맘때 나오는 눈개승마를 곁들인 등심 스테이크는 삼겹살이나 목살이 아닌 비인기 부위 구이를 소개하고자 준비했다.

④돼지 역시 소처럼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돼지 머리로 국물을 내고 국수처럼 썬 돼지 껍데기와 돈설로 고명을 낸 돼지사골국수.

⑤멋진 디저트도 나온다. 돼지껍질을 말린 후 튀겨 설익은 딸기와 곁들였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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