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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국보 '삼국유사'가 은행 철제 금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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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소장 국보·보물 관리 실태

습기에 취약한 紙類 문화재 다수 은행 금고에 보관… 손상 우려돼

문화재청, 5년마다 정기조사

사유재산이라 관리에 강제성 없고 해외반출 등 즉각적 파악 어려워

1974년 서울 태평로에 개관한 성암고서박물관은 고서 3만권과 고문서·활자 5만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국보 3건, 보물 18건 등 국가지정문화재만 21건이다. 고(故) 조병순 관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6·25전쟁 이후 귀한 고서(古書)들이 장판지로 쓰이며 홀대받는 것을 본 뒤 건축 사업을 하며 고서 수집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2013년 조 관장이 별세한 후 박물관은 사실상 폐쇄됐다. 국보·보물 21건은 모두 자녀 4남매의 공동 소유가 됐고 현재 서울시내 A은행 대여금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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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고서(古書) 컬렉터로 첫손 꼽혔던 고(故)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2007년 본지 인터뷰에서 소장품인 활자 인쇄 세트를 공개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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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것. 습기에 취약한 고서 21건을 밀폐된 철제 금고 5칸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어 손상이 우려된다. 2015년 이 문화재들을 점검한 문화재청 관계자는 "특히 '중용주자혹문(中庸朱子或問·보물 제707호)', '급암선생시집(及菴先生詩集·보물 제708호)' 두 건은 표지가 찢기고 종이가 변색·오염되는 등 상태가 불량해 보존 처리를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며 "소유자들에게 보관 장소를 바꾸거나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국립박물관에 기탁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유자 바뀌면 15일 내에 신고해야

개인 소장 유물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될 경우, 국가는 해당 유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2017년 2월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동산문화재는 1643건(국보 234, 보물 1409). 그중 개인(서원·문중 포함)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보물은 26.5%인 436건이다. 해외로 유출되지 않는 한, 문화재보호법은 사유재산인 국보나 보물의 매매를 허용한다. 소유권 변동이 생긴 지 15일 내에 바뀐 소장자가 해당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문화재청에 신고만 하면 된다(4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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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은행 금고에 있는 성암고서박물관 국보와 보물.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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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화재가 불법 반출된다 하더라도 정부가 즉각 알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황권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은 "문화재의 국외 유출을 막기 위해 공항과 항만에 문화재감정관실이 있지만, 만에 하나 이를 빠져나가 해외로 빼돌릴 경우 정부가 바로 알기 어렵다. 5년마다 실시하는 실태 조사 때라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5년마다 문화재청이 관리 실태 조사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재에 대해 5년에 한 번 정기조사를 한다. 직원 1명과 전문가 2명(보존과학 1명 반드시 포함) 등 최소 3명 이상이 동행해 해당 유물이 신고된 장소에 보관돼 있는지, 보관 상태와 주변 환경은 어떤지를 점검한다. 조사 결과 유물의 상태가 심각하거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엔 국가·지자체 예산(보통 국비 70%, 지방비 30%)을 투입해 보존 처리를 해준다. 정제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개인이 갖고 있는 유물은 주로 초상화, 전적 등의 지류(紙類) 문화재가 많아 빛과 습기에 취약하지만 박물관처럼 보존 처리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국가 예산을 들여 찢기고 변색된 부분을 '수술하는' 보존 처리를 해준다"고 했다.

문제는 보존 처리 후 관리가 허술해도 '권고'를 할 수 있을 뿐 강제성이 없다는 것.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황권순 과장은 "지류 문화재는 항온·항습이 잘 갖춰진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전적물을 은행 금고에 보관하는 개인 소장자들이 많아 우려된다"며 "밀폐된 철제 금고는 고서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현장 조사 때마다 보관 장소를 바꾸라고 권하고 있지만 소유자가 응하지 않으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성암고서박물관의 국보·보물 21건은 조 관장 생전인 2005년부터 A은행 금고에 넣어 보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곽모(73)씨가 소장한 국보 제306호 '삼국유사' 권제3~5권은 B은행 금고에, 염모(73)씨가 소장한 보물 제775호인 '금강반야바라밀경'은 C은행 금고에 있다. 정제규 전문위원은 "문화재를 개인 재산으로만 볼 게 아니라 그 가치를 공유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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