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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취재파일] '인사 불이익 우려' 판사가 88.2%…"새까맣게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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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기만 할 것 같은 주말 한낮의 대학 캠퍼스가 북적거렸습니다. 어제(25일) 연세대학교 광복관 국제회의장에 전국 판사 수십 명과 학계 인사들이 모인 것입니다. 취재진들도 몰렸습니다. 한 토론회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법원 내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국제적 비교를 통한 법관 인사제도의 모색>이라는 학술대회입니다.

이렇게 들으면 '이게 무슨 어렵고 재미 없는 말이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술대회의 개최 규모를 전국 법원에 대한 행정업무를 도맡은 조직에서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고 하면 느낌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습니다.

지난 2월 20일 자로 법원 인사가 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법관들이 선망하는 '법원행정처 심의관' 자리에 수도권의 한 법원에서 일하던 판사가 가게 됩니다. 이 판사는 2월 15일 즈음 해서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앞두고 '그 자리에서 일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합니다. 18일부터 19일까지 있었던 사전 워크숍에도 참석하지 않고, 20일에도 출근하지 않습니다. 법원은 20일 오전, 이 판사를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인사를 추가로 냅니다.

결국, 논란의 근본은 이 판사가 왜 인사를 거부한 지입니다. 한쪽에선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가 개최하는 토론회를 축소하게끔 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법원행정처는 해당 판사가 개인적인 사유를 들어 인사를 거부한 것이고,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판사 본인은 "제가 경험한 부분에 대하여는 어떤 방식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옳은지 고심하고 있다"고만 전한 상태입니다.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당 지시'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법원행정처의 고위 간부는 업무에서 배제됐다가, 이후 재임용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판사는 한 번 임용되면 10년 후 자동으로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재임용을 신청해 다시 근무하기 시작하는 형태로 일을 이어갑니다. 해당 간부는 10년 주기가 때마침 돌아왔는데, 재임용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사실상 사의 표명입니다.) 일선 판사들은 판사회의를 잇따라 열고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법원은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습니다.

다시 어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열린 국제인권법연구회가 개최한 학술대회의 도대체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일까요? 실제로 법원행정처의 축소 지시가 있었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결국 단순한 의혹이었다고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어떤 부분이 의혹의 빌미가 됐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판사가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 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와 이 설문조사가 공개될 학술대회의 주제 때문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바로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 말입니다.

현재 대법원장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법관을 제청하고 법관에 대한 인사권과 사법행정사무를 지휘감독하는 등의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어제 학술대회에 발표한 인사들은 이에 따라 법관들이 관료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법관의 꽃'이라 불리면서 동시에 고위법관으로서 역량을 인정받는 통로로 여겨지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가 문제라고 봤습니다. 그렇게 일부 인사들에 대해서만 '영전'이란 헌화를 선사하고, 그들이 다시 지방법원의 법원장이나 수석부장으로 내려오기도 하는 인사 시스템으로는 법원 조직이 피라미드식 관료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학회가 벌인 설문조사는 법관들이 이에 따라 재판의 독립성이 담보되지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이런 인사 시스템 때문에 윗사람 눈치 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2천9백 명정도 되는 전체 법관 가운데 5분의 1가량인 502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88.2%인 443명이 '법행정권자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 표현을 하면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대답했습니다. 또, 행정부나 특정 정치세력의 정책에 반하는 판결을 해도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없다는 데에 대해서도 36.5%인 183명은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44명이 8.8%는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또, 복수로 선택할 수 있는 질문에서, 법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승진 등 인사 분야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895, 평정 등 직무평가 분야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72%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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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단언하건대, 인사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훼손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법관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상부의 지침과 다른 결정을 하는 것 같고, 그동안의 판례와 조금 결이 다른 판단인 것 같고, 우리나라에서 소위 '잘 나간다'는 세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결단인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소신을 지키는 과정에서 속앓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앓이가 이번 설문조사에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에 따라 학술대회에서 이어진 '제언' 과정에서도, 대법원장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인사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습니다. 일정 경력을 기준으로 고등법원 판사와 지방법원 판사를 나눠서 각급 법원에서만 근무하는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 법원장이 아닌 위원회가 법관 사무분담을 결정하는 것, 법원장 호선제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발표 내용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어제의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일 일어날 남은 일은 무엇일까요?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와 학회가 건의한 내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학회 건의 내용이야 법원 내 토론을 통해 수렴돼야 할 일인 만큼 논외로 하더라도, 이처럼 대법원장의 권한을 줄이는 방식의 제도 개선을 주장했다고 해서 실제로 외압을 가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인지 밝혀내는 것은 법원 밖에서도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이인복 진상조사위원장은, 구체적인 조사 계획 등을 외부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성지용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고연금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이화용 의정부지법 부장판사, 안희길 서울남부지법 판사, 김태환 서울가정법원 판사, 구태회 사법연수원 교수를 위원으로 선정해 앞으로 2~3주간 대면 조사 등의 방식으로 조사를 벌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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