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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매거진M] 홍상수와 그의 영화, 영화에 '나'를 반영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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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 태생부터 자기 반영적이다. ‘최초의 영화’라고 불리는 ‘기차의 도착’(1895, 오귀스트 뤼미에르·루이 뤼미에르 감독)을 보면, 어떤 행위를 연기하고 다시 그것을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마치 거울을 보듯 스크린에 자신의 모습이 영사되는 즐거움, 말 그대로 자기 반영성이 영화의 오락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모든 영화는 감독의 자기 반영적 결과물이며 또 아니기도 하다. 예컨대 자기 반영적 연출로 유명한 잉마르 베리만(1918~2007) 감독은, 아예 영화를 자기 탐구의 매개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작 자기 자신을 탐구한 작품이 왜 영화사에 긴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매우 좁고 예민한 대상 안에, 인간의 보편적 갈등과 고뇌와 모순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영화를 통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중앙일보

밤의 해변에서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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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이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3월 23일 개봉)에 대해 “이것은 자전적인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달리 답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자서전 같은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자전적인 영화는 맞다”라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서전 같은’과 ‘자전적인’의 의미는 다르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사실과 결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소재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계기가 현실과 부합한다면, 그것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여러 작품을 가리켜 “자전적인 면이 많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박 작가의 삶이 그가 쓴 소설과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 속 어떤 사건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그것을 자기 반영적 서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자기 반영적’이라는 말은, 소설이 소설을 돌아보고 영화가 영화를 돌아보는 메타적 방식까지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홍 감독의 영화는 늘 자기 반영적이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영화를 고민하는 감독이자, 서사를 통해 서사를 고민하는 작가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이번 영화를 “자전적인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심연에 무엇이 있는지 시간을 두고 돌이켜 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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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창작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창작의 길에 들어선다.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 이야기를 쓰다 보면, 그것이 대단히 새롭거나 놀랍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굉장히 기이하거나 고통스럽게 여겼던 일도, 작품으로 만들고 나서 보면 그저 그런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내 일은 크게 생각되고 남 일은 사소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 창작의 세계에서 그것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까지도 작품을 통해 ‘내 일’처럼 공감하고 동일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말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설득의 기술’이라 부른다. 하지만 허구의 서사 세계에서는 그럴듯함, 즉 ‘개연성의 문제’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그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럴 만하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동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고백의 진정성이 아니라 설계의 미학성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설득의 기술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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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러한 솔직함은 때때로 나르시시즘의 변명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에 대해 실제로 자신이 겪은 일이라며 자전적 성향을 내세우는 것도, 반대로 자신과 절대 무관한 일이라며 자전적 성향을 부정하는 것도, 어떤 점에서는 ‘나’를 지키려는 강력한 나르시시즘의 발로일지 모르겠다. 타인을 설득하는 것은 교육과 학습으로 가능해진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나르시시즘을 긍정적 해소 방식으로 활용해 작품을 탄생시킨다. 가끔 비난은 나르시시즘에 매우 달콤한 채찍이 되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진짜 이야기나 진짜 예술은 자기를 벗어나야 완성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객관적 자기 반영이 가능할 때 말이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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