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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네이버 이해진, 퇴진 후가 더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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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격인 이사회 의장 사퇴… 재계 모범사례로 남을지 주목



“전 ‘은둔의 경영자’가 아닙니다. 제가 잘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지난해 7월 글로벌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인 ‘라인’의 미국 뉴욕 증시 상장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해진 네이버 전 의장이 밝힌 소회 중 일부다.

네이버의 창립자이자 실질적인 ‘오너’로 알려진 이 전 의장은 스스로 “간담회 자리가 익숙지 않다”고 토로할 정도로 네이버의 인지도나 규모에 비해 공식석상에 나서는 일이 드문 편이다. 오너들의 업적을 치켜세우고 홍보하는 데 바쁜 다른 대기업들과는 달리 네이버가 이 전 의장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앞세우는 일도 거의 없다. 이에 언론과 재계에서는 이 전 의장을 곧잘 ‘은둔의 경영자’라고 표현했다. 이 전 의장의 소회는 이에 대한 ‘항변’에 가까운 말이었다.

유럽으로 간 이해진

일반적인 대기업 총수나 오너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이끌어온 이 전 의장은 최근 또다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번엔 ‘은둔’을 넘어 그간 총수 자리나 다름없던 이사회 의장 자리를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이를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이 전 의장이 의장직에서 내려온 것 자체가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요즘 시기엔 더욱 그렇다. 이 전 의장의 향후 행보에 대해 재계 전체가 주목하는 이유다.

네이버는 3월 17일 주주총회를 열어 신임 이사회 의장으로 변대규 휴맥스 이사회 의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한성숙 전 서비스총괄본부장을 선임했다. 이로써 이 전 의장은 최대주주와 대표이사 자리에 이어 이사회를 주도하는 의장 자리까지 내려놓게 됐다.

창립자이자 오너이긴 하지만 이 전 의장이 네이버의 최대주주 자리에서 내려온 지는 벌써 몇 년 됐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 자료를 보면 이 전 의장은 2001년 8월부터 최대주주 지위를 유지하다가 2014년 9월 국민연금에 최대주주 자리를 내줬다. 벤처로 시작한 네이버는 확장 과정에서 지분 맞교환 등의 방식으로 외부 자금을 수혈했다. 이 전 의장 역시 필요할 때마다 꾸준히 지분을 매각하거나 스톡옵션 등으로 임직원에게 양도하면서 현재 보유 중인 네이버 지분은 4.64%에 불과하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최대주주인 국민연금(11.27%) 지분의 절반도 안 되고, 5%가 넘는 지분을 보유한 2~3대 주주인 외국계 펀드의 지분에도 못미친다.

일찌감치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네이버에서 이 전 의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한 기간 역시 길지 않다. 공동대표였던 김범수 카카오 의장(과거 NHN 공동대표)이 회사를 떠난 이후인 2000년대 중반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으로 회사 경영에 관여해 왔다.

지분율에 있어 회사를 지배할 여력이 못됐고, 대표이사 자리에도 연연하지 않던 이 전 의장이지만 유일하게 오랜 기간 유지해온 자리가 의장 자리였다. 2004년부터 지난 17일 주주총회가 열리기까지 13년간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했다. 비상근직인 네이버 의장직은 실무에 관여하기보다는 자문역에 주력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도 대외적으로는 “대표이사가 최고결정권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 전 의장이 창립자인 데다 상근직인 사내이사 자리까지 유지해온 탓에 그간 네이버의 굵직한 투자계획이나 사업성과가 공개될 때마다 그 배경에 이 전 의장이 거론돼 왔다.

이 때문에 이 전 의장이 의장직을 내려놓은 것을 과거 최대주주나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을 때와는 다른 ‘중대한 변화’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물론 의장직을 내려놓는다 해서 이 전 의장이 네이버를 떠났다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등기이사로 해외투자부문을 담당하고 있고, 미국과 일본에 상장된 네이버의 자회사인 라인의 회장직도 유지하고 있다. 네이버의 현 이사진이나 주요 경영진들 대부분이 이 전 의장이 영입한 인사들이라는 점에서도 이 전 의장의 영향력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안에서 손을 뗀 이 전 의장이 향한 곳은 유럽이다. 네이버 매출의 60%는 국내 서비스와 광고에서, 40%는 해외 서비스를 주로 하는 라인에서 발생한다.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인 상황에서 네이버 역시 해외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다. 라인의 경우 글로벌 경쟁이 심한 탓에 당분간은 일본과 태국 등 아시아권 시장을 지키고 확대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유럽 시장은 네이버에 불모지나 다름없지만 ‘반(反) 구글’ 정서가 강한 곳이라 틈새시장을 공략할 여지는 남아있다.

네이버는 이미 지난해 9월 유럽 벤처캐피털인 ‘코렐리아캐피털’에 라인과 함께 1억 유로(약 1200억원)를 출자한 상태다. 유럽 시장에 곧바로 네이버나 라인을 들고가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 지역 내 유망한 스타트업(신생기업)을 발굴해 이를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이 전 의장이 해외투자를 담당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시작해 일본에서 꽃을 피운 라인처럼, 유럽 현지에서 시작한 서비스로 유럽을 공략한다는 게 이 전 의장의 전략이다.

경향신문

‘경영권 세습’은 없다

이 전 의장의 의장직 사퇴는 ‘경영권 방어’에 집착하는 기존 재벌들의 행태들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재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벌들은 경영권 방어라는 명목 아래 본인 혹은 우호지분을 늘리거나, 계열사 및 금융계열사 등을 동원해 지배력을 높이거나, 특정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자금을 확보하거나 하는 등의 불·편법행위를 밥먹듯이 해왔다.

반면 이 전 의장이 가진 4.64%의 지분은 개인투자자 측면에서는 큰 것일지 몰라도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기엔 어려운 규모다. 삼성물산의 경우 2015년 제일모직과 합병하면서 합병에 찬성하는 우호지분만 30%를 넘게 확보하고도 앨리엇 문제를 들어 “경영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의장의 경우 가족이나 친지 등 ‘특수관계인’이 가진 지분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호지분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모든 우호지분을 동원한다 해도 지분율이 5%를 넘기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전 의장은 수년째 네이버 지분을 늘리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이 전 의장이 임직원들에게 평소 “저도, 여러분도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게 허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네이버는 다른 재벌들처럼 순환출자를 통해 기업을 지배하는 구조도 아니다. 네이버가 5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긴 해도 상장사는 네이버와 라인 두 곳뿐이고, 라인을 포함한 계열사 대부분이 네이버가 100% 지분을 출자해 만들어진 곳들이다. 재벌들이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금융계열사나 공익법인은 아예 없다. 이 전 의장이 라인의 스톡옵션(557만여주)을 갖고 있긴 해도, 이 역시 네이버에 대한 지배력 강화와는 관계가 없는 부분이다. 오너나 오너 일가가 출자한 계열사가 없다보니 일감 몰아주기 문제가 불거진 적도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배력이 약한 이 전 의장이 경영권을 방어하려면 꾸준히 회사 경영에 관여하면서 지배의 ‘실효성’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며 “그럼에도 의장직을 내려놓은 것은 이 전 의장이 경영권을 지키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자녀 세대로의 경영권 세습도 현재로선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아들과 딸 한 명씩을 자녀로 둔 이 전 의장은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 자체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네이버처럼 벤처에서 시작해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 중 일부가 친족경영을 하거나 세습경영을 준비 중인 것과도 대비되는 부분이다. 통상 재벌 2~3세들이 20대 초·중반부터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해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는 데 비해 사회에 진출할 시기가 된 이 전 의장 아들의 입사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네이버 관계자는 “앞으로도 이 전 의장 자녀들의 입사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경영권 방어나 세습 문제는 횡령·배임·탈세 등 온갖 재벌들의 범죄를 양산하는 근원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서 드러났듯이 정경유착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네이버가 포털 독과점 논란이나 골목상권 침해 논란, 문어발식 사업 확장 논란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오너 일가의 경영권 방어나 세습 문제에 있어서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경향신문

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라인’을 운영하는 라인주식회사 관계자들이 지난해 7월14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회사 상장을 알리는 오프닝 벨을 울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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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식 ‘혁신’은 성공할까

이 전 의장이 2선으로 후퇴한 이후 관건은 네이버가 이 전 의장 없이도 계속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느냐의 여부다. 이는 곧 이 전 의장이 경영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네이버의 주요 주주들인 기관투자가나 외국계 펀드들은 경영 참여보다는 투자가 주식 보유의 주요 목적이다. 네이버가 현재의 성장세를 유지하는 한 주주들이 이 전 의장이나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할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이 전 의장이 과감하게 의장직을 박차고 나간 이면에는 네이버의 성장세가 일정 수준 궤도에 올랐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네이버가 성장하려면 모바일 카메라 서비스인 ‘스노우’ 등 신규사업의 안착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내부 인사·조직 관련 혁신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가 중요하다. 네이버는 내부 ‘순혈주의’ 인사를 고집하기보다는 시기에 따라 필요한 인력들을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9년부터 8년 가까이 대표이사를 지낸 김상헌 전 대표만 해도 판사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과거 대우그룹 해체과정이나 LG그룹 구조조정 작업 등에 참여하면서 잔뼈가 굵은 재계 전문가이기도 했다. 새로 선임된 한성숙 대표는 검색서비스였던 ‘엠파스’에서 영입된 외부 인재다. 검색서비스는 오늘날 네이버를 있게 만든 주력 사업이자 향후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결합해 발전시켜나가야 할 미래 사업이기도 하다. 기존 서비스의 내실을 다지면서 신사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게 한 대표의 과제가 될 전망이다. 변대규 의장이 주도하는 이사회가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지도 주목된다. 변대규 의장의 경우 성공한 벤처 1세대로서 이 전 의장을 대신해 사업과 경영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시각을 이사회에 전할 예정이다.

네이버는 올 들어서 임원제도를 과감하게 폐지하기도 했다. ‘속도’를 위한 결정이다. 모바일 시장에서는 속도가 생명이다. 빠른 의사결정과 빠른 시행이 필요하고, 빠른 판단과 대처를 통해 안될 것은 버리고 될 것은 키우는 게 중요하다. 네이버가 ‘밴드’를 운영하는 캠프모바일을 분사하고 최근에는 스노우와 웹툰서비스를 분사키로 한 것도 모두 속도를 위해서다. 이재웅 다음 창업주는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에선 창업자도 아닌 상속받은 재벌 회장이 다시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인식돼 왔지만, 네이버 같은 새로운 유형의 기업이 새로운 물길을 열어가고 있다”며 “한국 경제에 네이버가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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