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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傳(1)] "경제는 당신이 수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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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택이 김일성을 대신해 경제 맡아

북한 경제 호황기 이끈 주역

일본 도쿄 유학한 광산지배인 출신

중국 천윈과 비견되는 계획경제 설계자

80년대 북한 경제 어려워지자

김일성 "정준택만 있었으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오매불망 간절히 바라는 것은 경제강국이다. 김일성은 한 평생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 살려는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달성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역설했다. 김일성의 ‘소원’을 아들인 김정일은 실현하지 못했고 손자인 김정은은 ‘경제발전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으로 노력하고 있다. 세 부자가 그 동안 인민들을 배불리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70일 전투’, ‘100일 전투’, ‘200일 전투’ 등 노력동원을 통해 주체적으로 달성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방법과 방향이 틀렸다. 지금도 여전히 잘못된 방향과 방법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70일 전투’를 ‘200일 전투’로 늘린다고 북한 경제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북한 경제를 이끌었던 총리들을 통해 그들의 노력과 문제점을 살펴보고 남북 경제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 자 한다. [편집자주]

김일성의 경제 참모 정준택

김일성은 6.25전쟁 끝난 이후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다져갔다. 전쟁 이후라 계획경제의 필요성이 증가했고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기반한 경제를 운용할 수 없었다. 국가가 자원을 분배하고 물자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는 계획경제의 형태를 강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1950년대 김일성의 직책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내각 수상이었다. 내각 수상은 지금과 비교하면 국무위원장에 해당된다. 김정은은 현재 당 위원장, 당중앙군사위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국무위원장을 맡고 있다.

50년대 내각 수상의 역할은 지금의 국무위원장에 내각 총리를 보탠 자리다. 북한이 197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내각 수상의 역할이 국가주석과 정무원 총리로 분리됐다. 국가주석과 정무원 총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국무위원장과 내각 총리에 해당된다.

국가주석과 정무원 총리로 분리되면서 경제는 총리에게 맡겨졌다. 지금의 중국 국무원 총리가 경제를 책임지는 것과 같은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1950년대 북한 경제를 이끈 실질적으로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라 정준택(1911~1973)이다. 국가계획위원장과 정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는 등 북한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정준택은 지금의 총리 자리는 아니지만 김일성을 대신해 북한 경제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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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1968년 평양시 승호지구를 현지지도하면서 정준택(사진 왼쪽)에게 사업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월간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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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정준택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1990년 10월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전문가 양성기관인 원산경제대학을 그의 이름을 따서 정준택경제대학(현재 정준택원산경제대학)으로 개명한데서 알 수 있다.

김일성과 정준택의 인연은 1945년 11월에 시작됐다. 김일성이 일제 시대에 한국의 최대 중석을 산출하는 황해북도 곡산군 만년광산의 지배인 출신이었던 정준택에게 산업국장을 맡긴 것이다. 당시 산업국장은 나라의 공업을 담당하는 중책이었다.

정준택은 개성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자혜의과대학에 다니다가 ‘적색독서회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2년 만에 퇴학당했다.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서울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뒤 선광기사 자격을 취득한 뒤 일본 미쓰비시(三菱)광업회사에 취직하면서 광산에 발을 디디게 됐다.

김일성은 장기간 일본 식민지 지배로 인한 저발전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지식인을 활용하는 이른바 ‘인테리정책’을 실시했다. 1948년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북한 경제의 사령탑인 국가계획위원장에 정준택을 앉혔다. 정준택은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인테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테리’로 꼽히는 인물 대다수는 친일파였다. 당시 북한에는 전쟁으로 인해 각 분야의 인재가 부족했고 남아있는 지식인은 일제 치하에 관료로 지내거나 도쿄 유학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국가 운영을 위해 과거 친일 행적이 있더라도 간부로 눈감고 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준택은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 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산업과 계획사업을 맡으며 경제 각 부문을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김일성은 80년대 중반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자 “정준택이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50년대 중반 소련의 원조가 삭감하면서 북한은 자본·물자·기술 부족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집단 증산운동 이른바 ‘천리마 운동’을 본격화하고 전쟁으로 인한 농촌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농업협동화’ 작업을 진행했다. 생산과 유통 전반을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1950년대 말 북한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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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트랙터를 생산하는 북한 기양농기계공장 노동자들. [사진=조선화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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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한 경제의 슬로건은 ‘중공업 우선, 경공업· 농업 동시 발전’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중공업 우선이면 경공업과 농업은 뒤로 쳐질 수밖에 없다. 인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중공업 우선에다 경공업· 농업 동시 발전이라는 말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왜 중공업 우선일까? 당시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중공업 우선정책을 추진했다. 이유는 3가지다. 첫째, 중공업이 국가 경제발전 수준과 경제적 실력을 의미했다. 따라서 경제 발전 경쟁이 다분히 중공업의 비중 높이기에 집중됐다. 둘째, 국방력과 국민경제의 전쟁동원 능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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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굴착기를 생산하는 북한 낙원기계공장 근로자들. [사진=조선화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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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자본주의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자주 국방을 우선시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공업이 관건이었다. 셋째, 농촌인구가 대다수였던 북한이 경공업을 우선 성장으로 삼으면 시장협소와 수요부족에 부닥칠 수 있었다.

정준택은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중국 계획경제의 거두인 천윈(陳雲, 1905~1995)과 비견된다. 천윈은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국무원에서 계획경제를 설계했던 인물이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이 계획경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1950년대 초 공식석상에서 “경제는 천윈이 제일 잘 안다”, “천윈 동지가 한 말들을 새겨듣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칭찬에 인색했던 마오쩌둥이 누군가를 극찬한 것은 극히 드물었을 정도로 최고지도자에게 신임을 받았던 부분에서 정준택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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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1973년 1월 정준택 장례식에 참석해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금별메달을 그의 시신에 달아주고 있다. [사진=월간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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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정준택의 삶을 가리켜 ‘오랜 인테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한 정권 수립 시기부터 27년 동안 김일성의 곁을 지키며 지식인으로서 경제를 맡아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북한은 그를 당·정 모든 경제 간부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으로 내세우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이 정준택의 부인인 김정원의 60세, 70세, 80세, 90세 생일 때마다 생일상을 차려주었다고 선전했다.

이경주 인턴기자 lee.kyoungjoo@joongang.co.kr

고수석 기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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