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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좋아했을 뿐인데 '나'도 찾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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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성운' 번역한 정보라, 延大서 SF 강의… 소설집도 출간

"자아란 뭘까요? DNA가 똑같더라도 경험이 다르면 다른 자아를 갖게 되겠죠? 만약 신경회로를 동기화해서 모든 복제 인간이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 그들은 동일한 인간일까요?" 연세대학교에선 매년 1학기 'SF를 통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교양 수업이 열린다. 2013년부터 5년째 SF작가 필립 K. 딕이나 아이작 아시모프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토론한다. "5년 전쯤 빌려 본 미국 철학논문집 서론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훗날 과학이 발달해 A의 뇌를 B에게 이식한다면, 그는 A인가 B인가'. SF와 철학이 먼 얘기가 아니구나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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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서울 연세대에서 만난 정보라씨는 “SF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해준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이 강의를 개설해 맡고 있는 강사 정보라(41)씨의 행보 역시 SF와 인연이 깊다. 강의뿐 아니라 소련 SF 작가 이반 예프레모프의 대표작 '안드로메다 성운'을 최근 번역·출간한 데 이어, 환상소설집 '저주 토끼'까지 연달아 냈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가 확연해진 건 연세대 학부시절. 1998년 상금 100만원짜리 교내 문학상을 위해 첫 소설을 썼다. 변기 밑으로 쓸려내려간 오물이 하나둘 모여 사람의 형체를 이루고, 결국 밖으로 나와 제 주인을 변기에 쳐넣어 버리곤 대신 살아간다는 스토리('머리')가 상을 탔고, 결심했다. "난 앞으로 이 방향으로 가야겠구나."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석사),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박사)을 공부했다. "러시아 문학이 저한테 맞아요. 한국식 한(恨)의 정서와 비슷한 게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저주의 물건을 다룬 표제작과 쥐와 벌레가 들끓는 건물을 매입한 가정의 얘기를 다룬 '즐거운 나의 집' 등 수록작 10편은 '한'의 환상성이 강하다. "전부 쓸쓸한 내용이죠. 복수가 이뤄져도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 외로움의 방식이 외로운 독자들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2008년 계간 '판타스틱'으로 본격 활동을 시작한 그의 소설은 '삼국유사' 류의 설화를 연상케 한다. 그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묘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콩나물국을 불에 올려놓고 잠깐 졸았는데 꿈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가 슬그머니 옆으로 오더니만 '어머 큰일 났네' 놀라면서 황급히 나가더래요. 그래서 잠에서 깼는데 콩나물국이 주근깨 박힌 여자 얼굴처럼 바짝 졸아 있었다는 얘기 같은 거요."

그런 얘기를 사랑한다. "잘 안 알려지고 엉뚱한 작품을 번역해 소개하고 싶어요." SF와 환상소설 9권을 번역했는데, 지금은 외계 비행체가 지구에 착륙해 빚는 소동을 다룬 폴란드 SF 소설 '그림자로부터의 탈출'을 준비 중이다. 정씨의 '안드로메다 성운'은 러시아에 생존해 있는 예프레모프의 세 번째 부인과 아들에게 전달됐고, 다음 달 22일 현지 개최되는 낭독회에도 초청받았다. "참석은 못 할 것 같아요. 중간고사 채점을 해야 하거든요." 자아가 확실해 보였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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