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7 (수)

[미래의 눈]인간, 창조품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찬우는 갓 여섯 살이 된 딸 서영이 가볍게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찬우의 아내인 연희는 남편의 마음이 불안해지면 곧장 알아채는지라 딸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물었다.

“또 그 생각이야?”

찬우는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웃어보였다. 연희는 짜증을 내거나 잔소리를 하는 대신 찬우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세 식구를 서울에서 부산까지 태우고 가기 위해 옅은 잿빛 차량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찬우 부부가 함께 기록하고 있는 일정표 출발 시각과 단 1초도 다르지 않은 때부터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연희는 뒷좌석을 아동용 안전좌석 모드로 바꿨다. 딸 서영의 성장에 따른 사이즈 변화는 홈 데이터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되어 있는 가족용 차량은 안전좌석의 크기와 안전벨트 길이를 늘 자동으로 조정해주었다. 연희는 딸이 몸에 두른 안전벨트가 거북하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찬우는 운전석 문을 열어둔 채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연희가 물었다. “내가 운전석에 앉을까?” 찬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아내와 자리를 바꿨다.

가끔 오늘 같은 날이 있었다. 분명 식구는 셋이지만 누군가, 무언가 네 번째 식구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 있었다. 그 네 번째 식구는 가족의 일정을 모두 알고 있고, 누구든 건강 상태가 이상 수준에 도달하면 가장 먼저 알아채고, 늘 먹는 음식 재료가 떨어지면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주문까지 알아서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차에 타고 이동해야 할 때, 찬우는 네 번째 식구의 존재를 가장 강하게 느꼈고 그만큼 심기가 편치 않았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자율적으로 조종하는 인공지능을 흔히 카텔이라고 줄여 불렀다. ‘카’와 ‘인텔리전스’라는 단어를 합친 조어였다. 카텔이 스마트 하이웨이와 완전히 연계될 경우 교통사고 발생률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건 이미 상식이었다. 차를 몰고 이동하는 것을 표현하던 ‘운전’이라는 단어도 ‘승차’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차를 새로 구입하면서 이른바 ‘카텔 각서’를 쓰고 있었다. 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본인은 운전을 완전히 카텔에 맡기고 수동 운전을 포기합니다. 포기함으로써 발생하는 책임은 모두 본인 및 본인과 계약한 보험사가 맡습니다. 단 카텔 시스템의 오류나 문제점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는 예외로 합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경우 관할 민사 법원의 판단에 따릅니다.’

서명은 강제가 아니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겼다. 그 나머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찬우였다. 지인들은 그런 찬우를 옛사람이나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다.

‘아이를 태우고 가다가 사고가 났을 때 저도 모르게 발에 힘을 줘서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어떡하려고?’

‘자율 주행 차량은 모든 사람이 수동 운전을 포기할 때 효율이 높다고.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단 말이야.’

‘너 당뇨 있잖아. 만에 하나 저혈당 쇼크로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떡할 건데?’

지인들의 말이 하나같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수동 운전을 포기하고 카텔에 몸을 맡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찬우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들이 아니라, 가족이 살아가며 해나가는 크고 작은 일과 판단을 가져가버린 네 번째 식구였다. 그 식구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만질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찬우와 같은 소수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었다. ‘인공지능 공포증 환자.’ 인공지능 공포증이 정말로 병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찬우 아내인 연희는 남편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가 변경되면 즉시 바뀐 점을 반영하겠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연희는 인공지능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에,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연희는 남편이 안심할 수 있도록 차량 운전석에 앉아 반자동 모드를 켰다. 그러자 내장되어 있던 리본 모양의 운전대가 천천히 튀어나왔다. 남편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물론 연희는 카텔을 완전히 믿었다. 부산까지 가는 도로 위에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긴급 수동 모드를 작동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작은 연극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생각이었다.

뒷좌석에서 유아 교육용 인공지능 인터페이스와 놀고 있는 딸 서연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만, 남편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인류는 도구를 만들고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을 조금 확장하면 또 다른 쓰임새가 생긴다. 인간은 끊임없이 도구를 만든다. 그러면서 다시 도구에 적응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우리를 영장의 자리에 올려놓는 건 바로 그런 수용능력이 아닐까?

경향신문

우리는 도구가 발전한 끝에 지능을 획득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려 행동하는 예를 최근 들어 여러 차례 보았다. 그런 도구는 단순한 필요를 넘어서 인간의 호기심과 창조 욕구 때문에 등장했고, 앞으로는 도구에서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 우리 곁에 서 있을 것이다.

문을 열고 올라타기만 하면 나머지를 전부 알아서 해주는 자동차는 그런 존재들 가운데 아주 원시적인 형태다. 마냥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면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들과 나란히 서서 걷지 못한다면 더 넓은 세상도, 변화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고 인정할 시간을 주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김창규 SF작가>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