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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역사와 현실]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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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멀리 스페인을 다녀왔다. 여행 중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건망증 탓에 금세 다 잊었다. 뇌리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겨우 두어 가지뿐이다. 우선 인구에 관한 소감을 적어보자. 스페인 면적은 한국의 5배 이상이지만 인구는 4800만명에 불과해, 우리보다 300만명이 적다. 비행기가 스페인 북부 지방을 지날 때부터 실감이 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듬성듬성한 마을풍경이 더없이 한가로웠다. 스페인의 인구밀도는 한국의 5분의 1에 못 미친다.

1㎢에 평균 470명이 살아야 하므로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람 값은 헐하고 물건 값은 턱없이 비싼 것이 당연하다. 우리도 스페인만큼 성긴 인구밀도를 갖게 될 날이 있을까? 그렇게 되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 주거, 환경, 취업 문제가 쉽게 개선되고, 식량자급률이 100퍼센트를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 인구가 급감하면 연금과 건강보험 등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하나 큰 틀에서 보면 인구감소가 해로운 일만은 아니다.

뇌리를 스쳐간 또 한 가지 생각은 국운의 성쇠에 관한 것이다. 알다시피 스페인은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들이 ‘레콘키스타’ 곧 영토회복을 내걸고 이슬람세력으로부터 국토를 되찾은 것은 1492년, 그때부터 스페인은 ‘대항해’의 시대를 열었다. 콜럼버스와 그 후계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차례로 정복해 국고를 금은보화로 가득 채웠다. 지중해의 한 변방국가가 유럽의 최강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영광은 짧았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한 뒤 그들의 역사는 내리막길을 치달았다.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대결에서 연신 고배를 마시더니, 1898년에는 미국에도 졌다. 스페인제국의 자랑스러운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지고, ‘유럽의 후진국’이란 오명만 남았다.

17세기 이후 스페인이 장기침체의 늪에 빠졌을 때 그들의 왕은 무기력했고 귀족들은 부패했다. 지역갈등도 도를 넘었다. 죽어나는 것은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빈농이었다. 이러고도 어찌 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을까?

한국의 역사도 스페인과 닮은 점이 있었다. 15세기 전반 우리에게도 짤막한 황금기가 있었다. 한글이 창제되었고, 천문, 과학, 농업, 의료, 군사 등 여러 방면에서 굵직한 성과가 많았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한국사의 흐름은 답답하였다. 외침이 연이었으나 왕과 귀족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하였다. 권세가는 부패했고, 지방에서는 서원이 위세를 부렸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은 폐습으로 굳었고, 영호남에 대한 견제도 지나쳤다.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서 연명하기조차 어려웠다. 날이 갈수록 희망의 빛줄기는 약해졌다.

망조가 들면 누군가는 반드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옳은 소리를 낸다. 17세기 초, 스페인에서는 세르반테스가 포문을 열었다. 그는 <돈키호테>를 통해 세상의 환부를 드러냈다. 훗날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날카롭게 분석하였듯, 돈키호테와 그 하인 산초는 스페인 사람들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카잔차키스가 말한 돈키호테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내게 돈키호테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스페인의 혼’이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일깨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뜻은 옳게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의 위정자와 대중들은 돈키호테에 환호했으나, 그들이 받아들인 돈키호테는 해학과 유머가 넘치는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는 소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피하고자 수사의 장막을 쳤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장막에 갇혀버렸다.

20세기 초, 돈키호테는 400년의 기다림 끝에 찬란하게 부활했다. 스페인 사회도 잠에서 깨어났다고 할까. 파블로 피카소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한 장의 그림에 담아, 시대의 사명을 두 어깨에 걸머진 세르반테스의 노고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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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스페인의 사상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더욱 진지한 어조로 돈키호테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돈키호테에게서 도전과 신념의 인간, 영원한 스페인의 이상을 재발견했다. 돈키호테라는 인간상을 창조해 스페인을 위기에서 구하려 했던 선각자 세르반테스, 이 위인을 향한 가세트의 존경심은 끝도 없었다. 가세트와 피카소 두 사람은 20세기 스페인의 불의하고 폭력적인 현실권력과도 대결했다. 그들은 19세기 스페인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국주의자 프랑코 총통을 강하게 비판했다.

몰락을 거듭하던 조선후기 사회에도 양심적인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담헌 홍대용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들 역시 집권층의 독단과 오류를 낱낱이 비판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노력만으로는 기울어진 역사의 저울대가 바로 서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는 식견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무엇을 어디서부터 바꾸어야 할까. 가슴을 치며 다짐하는 소리가 터져 나와 이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바꾸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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