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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경제와 세상]가난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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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서울 여의도는 면적을 가늠하는 단위의 역할을 해왔다. “간척 사업으로 여의도 면적 몇 배의 땅이 새로 생겼다”, “여의도 면적 몇 배의 산림이 불에 탔다”는 식이다. 여의도 면적은 한강시민공원까지 포함하여 136만평, 서양식으로는 1112에이커다.

경향신문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18세기 후반, 유럽 귀족의 영지는 보통 수십만 에이커였다고 한다. 웬만한 귀족은 여의도 면적 수백배의 땅을 소유했다는 얘기다.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 작곡가 하이든을 후원했던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가의 영지는 한때 700만에이커에 달했다. 여의도의 6300배, 대략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강원도를 합친 면적이었다. 게다가 경기도나 강원도와 달리 헝가리는 대부분이 산지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다. 조선시대 천석꾼이나 만석꾼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실로 어마어마한 부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전쟁이 났을 때 귀족들이 제일 앞장서서 싸웠다는 유럽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나라를 위한 애국심도 물론 특별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본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대대손손 신분과 토지가 상속되는 봉건사회에서, 유럽인들은 가난의 이유를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나빴을 뿐 개인의 잘못이 아니며, 귀족이 아니면 가난해야 하는 사회구조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가가 개입하여 가난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유럽의 복지수준은 매우 높다. ‘복지를 위해서라면 많은 세금을 내도 좋다’는 사회적 합의의 근저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이러한 역사적 기억이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인들의 인식은 유럽과는 정반대다. 신대륙의 광활하고 비옥한 땅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무궁무진한 기회였다.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은 가난의 원인을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가난은 사회의 잘못이 아닌 개인의 잘못으로 생각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나? 땀 흘려 번 돈을 게으름 피운 사람 도와주는 데 쓰란 말인가? 이러한 인식의 전통 때문인지 미국은 유럽에 비해 복지수준이 매우 낮다. 심지어 전 국민 건강보험도 아직 없다.

건강보험이 없을 경우 미국의 병원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교통사고라도 당하여 중환자실에서 며칠 지내다보면 억대의 병원비가 청구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500만명(미국 인구의 13%) 이상의 저소득층이 의료보험 없이 살았다.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미국의 평균수명(79.3세)은 선진국 중 가장 짧으며, 우리나라(82.3세)보다도 3년이나 짧다. 폴 크루그먼 교수가 미국의 허술한 복지 시스템을 개탄하면서 한국의 의료보험제도를 부러워해 마지않던 이유다. 2014년 전 국민의 95% 가입을 목표로 ‘오바마 케어’가 도입되긴 했으나 이마저도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를 보면 가난의 원인이 게으름이나 의지박약 때문이라고 답한 우리 국민의 응답비율은 1996년 현재 놀랍게도 48.4%에 달했었다. 독일(9.6%)은 물론 미국(46.6%)보다도 더 높은 숫자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전 1990년대 중반 당시 우리 국민이 얼마나 자신감에 차있었으며, 기회는 많다고 얼마나 확고하게 믿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착잡한 심정이 든다.

그런 국민인식하에서 복지확대란 사실상 불가능한 어젠다였다. 그러나 그 뒤 IMF 외환위기, 카드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가난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201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가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는 응답은 41%로서 1996년 세계가치관조사에서의 48.4%보다 상당 폭 줄어든 반면, 불공정한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응답은 58.2%로 1996년 세계가치관조사의 50.2%보다 그만큼 더 늘어났다.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일갈에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요즈음, 이 조사를 다시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가난의 원인이 개인 탓이라는 응답은 더더욱 적어지고 사회구조 탓이라는 응답은 더더욱 많아지지 않았을까? 복지확대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좀 더 수월해졌을 것이라는 의미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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