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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잊지 말아요… 3·1 운동 전후 '독립운동' 단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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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전인 1919년 3월 1일은 우리나라 온 민족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항일운동을 한 날이다. 일본 시위대의 총격에 수 만 명이 쓰러졌고,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독립을 열망하는 3·1 운동의 그 정신은 광복 전까지 많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의 원동력이 됐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 단체는 무력 항쟁했던 독립군과 나라의 정통성을 지켰던 정부, 교육을 통해 민족을 깨우쳤던 계몽 단체 등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이 가운데 뚜렷한 활동 자료를 남긴 단체가 있는 반면, 어디에도 기술되지 않은 채 사라져 이름조차 못 남긴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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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전후 1910~1920년대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들 중심으로, 역사 기록물에 남은 독립군과 정부, 계몽 단체를 알아보자.

목숨 걸고 싸운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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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초기 의병들의 모습 /조선DB


독립의군부는 1912년 전라도 지방에서 고종의 밀칙(密勅)을 받은 임병찬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당시 임병찬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으로 서울·강화·개성·수원·광주 등 전국 각지에 병영을 두고, 대규모 의병 봉기를 준비했다. 아울러 일본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주요 관리들에게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 국권 피탈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조직이 발각되면서 임병찬을 포함해 조직원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 모든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다.

독립의군부에는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규합해 국권을 되찾으려고 했던 고종의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는 무장 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처음에 대구·경주 등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이 움직이다가 경기·충청·강원·황해 등으로 확대됐다. 군자금을 모으려고 금광 수송 마차나 우편마차를 습격해 일본이 거둔 세금을 탈취했다. 친일세력들에 통고문을 발송해 경각심을 주고 자금 모금을 추진하기도 했다. 1918년 대한광복회의 주축 회원들이 체포되면서 와해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 독립군의 명맥을 잇고 3·1 운동으로 역량이 집중되도록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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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립군 근거지


1919년 3·1 운동이 끝난 후 독립군 부대 양성에 더욱 탄력이 붙어 만주의 남쪽 지역에서만 70여 개가 결성돼 있었다. 그중 북간도에서는 북로군정서(총사령관 김좌진)대한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천주교인들이 만든 의민단(단장 방우룡) 등이 대표적인 독립군이었다.

활발한 독립군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이 지역에 독립군 소탕 지침을 내리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북간도 독립군들은 일본군 출병에 맞서기로 합의, 청산리를 거점으로 적을 급습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10여 차례 전투 끝에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 대첩'이었다. 일본군은 연대장 등 1200여 명이 사살됐지만, 독립군의 전사자는 100여 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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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왼쪽 위)과 홍범도(왼쪽 아래).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오른쪽)/국가보훈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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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독립군들은 청산리 대첩 이후 1920년에도 대한독립군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해 무장 투쟁을 계속 이어갔는데, 병력이 약 3500명에 이르렀다.

대한독립군단 이외에도, 1922년부터 남만주 일대에서 공동으로 항일전을 펼쳤던 통의부가 있었다. 군사기구와 자치행정기구를 함께 갖추고 있었는데, 군사기구(군사위원 이천민)에는 5개 중대와 유격대, 헌병대 등을 두고,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하지만 통의부는 여러 단체가 모여 만든 연합군 성격을 띠고 있었던 탓에 시간이 지나자 파벌이 생기면서 1929년 국민부와 혁신의회로 분리됐다.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혁신의회는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통의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동족끼리 유혈 사태도 있었으나 만주 지역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을 논의했던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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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장 김원봉 /우리역사넷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

일부 항일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은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미온적이라면서 더욱 과격하고 급진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을 약속하고 의열단을 발족했다. 1919년 발족 당시에는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을 필두로 13명의 단원이 모였고, 김대지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다. 규모가 점점 커져 1924년에는 단원 수가 70명을 넘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핵심 인물을 암살하거나 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작전을 세우고 폭탄 제조에 들어갔다. 전문 테러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부산경찰서·밀양경찰서·조선총독부 청사 등에 차례로 폭탄을 투척하며 일본에 한국의 항일 투쟁 의지를 보여줬다. 1920년대 중반 들어 개별적인 폭탄 투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의열단은 흩어졌다.

민족의 뿌리를 이어 나갔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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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군정부 대통령 이상설 /국가보훈처


러일 전쟁 10주년이었던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반일 감정이 한창 고조돼 있었다. 이에 발맞춰 한국의 독립 전쟁을 수행할 망명 정부(국가가 정복돼 외국으로 피신한 정치인들이 세운 정부)의 필요성이 대두해 대한광복군정부가 출범했다.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최초로 세운 망명 정부였다. 대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는 이동휘를 선출하고 산하에 광복군을 편성해 국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방위체제를 갖추면서 러시아 내 우리 민족의 정치 활동이 금지돼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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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오른쪽)대한민국 임시정부 회원들 /국가기록원·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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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주권 국민임을 뜻하는 임시정부(정식 정부가 탄생하기 전 단계인 준비 정부) 수립은 3·1 운동으로 촉발됐다.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 정부,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 정부 등 비슷한 시기에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곧이어 혼선을 줄이고 강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상하이를 근거지로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단일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을 이념으로 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선출했지만, 미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늘어나 초기 각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에도 개헌이 4차례 단행되면서 정부 형태가 계속 바뀌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자금은 민족들에게 거둔 인두세(한 사람당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와 재외동포들이 모은 성금 등으로 충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 전까지 국제법상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데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도 받았고, 정부 내 주요 인사들의 사상 차이로 잡음도 많았다. 어려움 속에서 27년간 정부 조직을 유지한 점,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미국·중국·프랑스·영국 등에 폭넓은 외교 활동으로 독립 의지를 피력한 점 등의 공로가 있다.

민족 실력 양성 운동 앞장섰던 계몽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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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회원들 /국가기록원


1908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W. Stevens)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재미 한인들이 1910년 대한인국민회 아래 하나로 뭉쳐 항일 운동을 펼치는 계기가 됐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하와이·멕시코·시베리아·만주 등에도 지방총회를 운영해 우리나라 동포들의 권익을 대변했다. 항일 의식을 담은 기관지 '신한민보'와 '국민보'를 발간해 국내외 배포하기도 했다. 최정익, 안창호, 이승만 등이 이곳에 소속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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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왼쪽 위)와 양기탁(왼쪽 아래). 105인 사건 당시 모습(오른쪽)/우리역사넷·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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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회복하려면 국민이 지식을 쌓고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안창호는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 양기탁을 찾아가 애국 계몽 단체 신민회를 비밀리에 만들 것을 제의했다.

1910년에는 한말(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 국내외 영향력 있었던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 대부분 모이면서 신민회의 회원 수가 8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우선, 청년들의 국권 회복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전국 각지에 학회를 열어 강연하거나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소년'을 창간했다. 또, 평양에 대성학교, 강화에 보창학교 등 신식 학교를 설립해 지식인을 양성했다. 만주 지역에서 의병들에게 현대식 군사 훈련을 가르쳤던 신흥무관학교도 신민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11년 '105인 사건(일본 경찰이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조선 초대총독의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을 계기로 일본에 조직이 드러나 700여 명이 체포돼 고문을 당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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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애국부인회 임원들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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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밀결사 조직은 송죽회로,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출신 교사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결성했다. 회원들은 월 회비를 꼬박꼬박 내 독립군에 자금을 보탰고, 매주 1회씩 집회를 열어 여성들의 애국심을 길렀다. 실제로 3·1운동에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게 된 것도 송죽회의 영향이 컸다.

본부는 평양에 있었지만, 회원들이 여러 지방에서 점조직(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서로 연결되지 아니한 조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대한애국부인회로 활동이 이어졌다.

1919년 서울에선 3·1 운동으로 투옥된 애국지사들을 옥바라지하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있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대구·부산·원산·전주·평양 등 지방 곳곳에도 지부를 설치했다.

특히,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지부 아래 종전에 없던 결사대를 설치하고 항일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여성들의 힘으로 독립전쟁에 활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회원에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는 간호원이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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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신간회 나주 지회·안동 지회·울산 지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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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외세에 대항해 민족의 자주·자립 확립)와 사회주의(생산수단 공유를 기초로 하는 평등사회 실현), 크게 좌우 진영으로 갈라져 있던 독립운동이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일어난 6·10 운동 이후 연합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27년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전선'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신간회가 창립됐다. 신간회는 서울 본부 외에 전국에 지회가 140여 개, 회원이 4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쟁취, 파벌주의·족보주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 독립운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하지만, 좌우익 세력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창립 4년 만에 해체의 길을 걷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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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과 한글학자들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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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어 사용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한글을 연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21년 조직된 조선어연구회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해 우리 말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은 물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해 오늘날 한글표기의 기준을 세웠다.

국어사전의 경우 조선어연구회가 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어 편찬 작업을 진행했는데, 일본에 발각돼 도중 그만뒀다. 광복 이후 1957년이 돼서야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일제강점기하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길게 활동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에 발각되면 지도자들이 줄줄이 끌려가 탄압을 받는 등 단체를 지속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이름으로 또다시 전력을 재정비해 독립운동의 기조를 이어갔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단체도 많았다. 임시정부의 경우도 하나로 통합되기 전, 서울·블라디보스토크·상하이 외에 4곳의 임시정부가 더 있었으나 기록에 남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이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끊임없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번 삼일절은 그간 잊고 있었던 조상들의 애국정신을 다시 한번 기리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픽 이은경

■ 참고
국가보훈처
우리역사넷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성 및 제작 = 뉴스큐레이션팀 이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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