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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Why] "머리 좋아진다" 다시 부는 주산 열풍… 외국에서 더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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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기억력 높아져 성적에 도움" 논문 잇따르며 인기 부활

"주산 배우면 IQ 20 ↑"

"게임·스마트폰에 찌든 아이들에게 특효약" 소문

방과후 학교·학원 늘며 죽었던 시장 되살아나

물 만난 주산 도사들

日은 초등 교과목에 포함… 일반인도 '3단 따기 운동'

미국·유럽·동남아… 한국인 강사 모시기 경쟁

주판도 진화한다

요즘 사칙연산은 기본… 제곱·세제곱 계산도 가능

수제 주판 만드는 장인 국내에 단 한명만 남아

조선일보

지난 12월 열린 세계 주산대회에 참가한 세계 17개국 어린이 4000여명이 주판 알을 튕기며 문제를 풀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주판·주산 바람이 불고 있다. / 한국주산암산수학연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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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우산동 주택가 1층에 있는 '운주 주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공업으로 주판을 만드는 곳이다. 변죽(주판틀) 구멍을 손으로 뚫고 주판알도 손으로 끼우고 망치로 두들겨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곳 대표 김춘열(67)씨가 주판을 만든 지 올해로 52년이 됐다. 주판 생산 1세대 중에선 김씨가 마지막이다. 주판 만드는 공장은 경기 용인에 한 군데 더 있지만 후대에서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16세 때 서울 청량리역 근처 주판공장에서 귀화한 일본인으로부터 주판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1979년 김씨가 고향인 전남 나주로 돌아와 주판 공장을 차렸을 당시 주판 인기는 대단했다. 상업고등학교나 주판학원에서 필수로 가르친 덕도 있었다. "신학기에는 일주일 내내 밤을 새워도 물량을 맞추기 어려웠다"고 김씨는 말했다. 하루에 주판을 수천 개씩 팔던 때였다. 하도급 업체까지 포함해 전국에 주판 만드는 공장이 17개쯤 됐다. 지금은 운주 주판을 포함해 단 두 곳뿐이다. 김씨는 "주판 공장이 거의 사라져서 아쉬운데 사람들은 오히려 주판 만드는 곳이 아직도 있느냐고 놀란다"고 말했다.

명맥 끊긴 목재 주판

나무 주판을 만드는 데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우선 변죽이라고 부르는 주판틀에 일정한 간격과 깊이로 구멍을 뚫어야 한다. 주판알을 꽂을 낌대를 주판틀에 끼우고 나서 주판알을 4개씩 채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판알의 모양이다. 손끝에 겉돌지 않는 모양으로 깎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로 1㎝ 안팎의 주판알 정중앙에 일정하게 구멍을 뚫는 것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모두 가느다란 드릴로 구멍을 뚫는다. 주판알 가로 간격은 1.5㎜로 맞춰야 한다. 주판알을 모두 끼운 뒤엔 눈금 선을 표시하고 마지막엔 손에 부드럽게 감기도록 주판 틀을 사포질한다.

주판알을 손으로 깎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서 김씨가 유일하다. 주문이 들어오면 박달나무를 구해 주판알을 만들고 편백나무로 주판틀을 만든다. 나무 주판알은 기계로 만들 수 없어 일일이 손으로 깎아야 한다. 손가락 끝에 착 달라붙는 모양으로 깎아내는 것이 기술이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드문 데다 재료인 박달나무를 구하기조차 어려워 2년 전부터는 생산이 중단됐다. 현재 운주 주판에서 만드는 주판 재료는 모두 합성수지다. 66㎡(약 20평)쯤 되는 김씨 작업장에선 이 모든 일을 김씨 내외가 하고 있다.

김씨도 1997년 운주 주판 문을 닫았었다. 회사마다 계산기와 컴퓨터가 막 도입된 때였다. 하루에 1000개꼴로 들어오던 주문이 하루아침에 뚝 끊겼다. 1983년엔 전국 상업고등학교에 주판 대신 계산기를 사용하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상고가 정보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몇 달간 버티다 결국 운영을 중단한 김씨는 주판을 팔거나 주판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년이 지난 2005년 김씨는 다시 운주 주판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라는 제도가 생길 즈음이었다. 방과후 학교뿐만 아니라 주산학원이 부활하면서 주판 주문량은 한 달 300~400개 정도로 늘었다. 김씨는 "예전만 못하지만 주문이 끊이지는 않는다"며 "주판 기능이 계산뿐이라고 무시하던 사람들이 다시 주판을 찾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에서 부활한 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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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초등학교의 80%에서 방과후 학교 과목으로 주산·암산을 선택하면서 주판과 주산 인기가 부활하고 있다. 방과후 활동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주산 학원을 찾거나 과외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1972년 주산 실력만으로 은행에 취업했던 정복희(64)씨는 퇴직 후 방과후 학교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정씨는 "주산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실력으로 은행에 스카우트됐었다"며 "요즘은 회사가 아니라 어린이 대상 주산이 인기이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주산 교육열이 높다"고 말했다. 정씨처럼 1970년대 상고나 여상을 나와 주산 실력을 활용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새로 주산을 배워 방과후 강사가 되는 사람들도 많다.

주산교육업체 '주산수리셈'의 김순집 대표는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생길 만큼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노출된 아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주산이 큰 해결 방법이 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주산이 뇌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지난 2015년 순천향의대·가천의대 정신과 공동연구팀은 주산을 배운 초등학생이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보다 수학능력, 주의력, 집중력, 기억력 등이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도 주산을 배운 초등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평균 IQ가 20씩 높았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주산업계 한 관계자는 "주산을 연습할 때 주로 불러주는 숫자를 집중해서 듣고 기억해야 주판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집중력이 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방과후 학교 주산 강사도 인기 직업이다. 서울교육청 방과후 학교 홈페이지엔 한 달에 10번꼴로 '주산 선생님 채용' 글이 올라온다. 자격 조건이 전공자, 관련학과 대학졸업자 등인데 국내에 주산 관련 학과는 없어진 지 오래고, 민간자격증이 된 방과후 강사 자격증 소지자가 우선 채용 대상이다. 그러나 주산 자격증을 발급하는 여러 민간 자격증 업체에서도 강사를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학원생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경기 용인에서 '이지셈 이정희 주산·암산학원'을 작년 인수해 운영하고 있는 라성운 원장은 "한 달에 80~90명이 새로 주산을 배우러 온다"며 "30년간 학생들에게 주산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렇게 인기 많은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학원 수도 늘어났다. 전국주산수학암산교육회는 서울에만 주산학원 100곳이 운영되고 있고 집계되지 않는 과외나 공부방까지 포함하면 주판을 사용하는 곳이 수백 군데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주산대회도 큰 인기

우리나라에선 주산의 불씨가 살아나는 정도이지만 해외에선 이미 주산의 인기가 높다. 주산 11단인 데다가 암산왕으로도 유명한 이정희(여·55)씨는 지난 2011년부터 미국 뉴욕과 뉴저지에서 주산·암산 강의를 하고 있다. 일본에선 재작년부터 초등학교 3~4학년 과목에 주산을 포함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주산 3단 따기 운동'이 활발하다. 주산학원 업계에 따르면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과거 주판을 써본 적 없는 미국과 유럽, 동남아 등에서도 주판·주산 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며 "우리나라 상고, 여상 등에서 주판 좀 만진다 했던 사람들이 해외에 강사로 취업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엔 한국주산암산수학연구회에서 주최한 주산 세계대회도 서울 세종대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 캐나다, 호주, 태국, 인도네시아, 남아공 등 총 17개국 4000명이 참가한 세계 최대 주산 대회였다.

주산 인기가 높아지면서 주판도 진화했다. 전국주산수학암산교육회 관계자는 "주판으로 사칙연산만 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인데 특허받은 주판으로는 사칙연산뿐만 아니라 제곱·세제곱 계산과 시·분·초 등 단위 변화까지 쉽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주판 모양 열쇠고리를 만든다든지 주판알을 갈색이 아닌 빨강·노랑·초록 등으로 만들어 아이들의 관심을 끌게 한 제품도 등장했다. 이지셈 이정희 주산·암산학원의 라성운 원장은 주판 한쪽 끝을 쇠로 고정할 수 있게 만든 암산 교육용 주판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운주 주판 김춘열 대표는 "일본에는 편백나무로 만드는 수공예 주판 업체가 3대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며 "내가 일을 놓으면 우리나라에서 주판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Why?' 조선일보 土日 섹션 보기

[김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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