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김성호의 자연에 길을 묻다]고양잇과의 마지막 자존심, 삵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살쾡이라고도 불리는 삵이 얼어붙은 강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습니다. 외할머니의 무릎은 내 차지일 때가 많았습니다. 무릎 베고 누운 내게 들려주신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시작이 같았습니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짧은 토막의 말이지만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수백 년 전의 아득한 옛날로 진짜 가 있는 듯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옛날에는 호랑이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꽤 친했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경향신문

무서움과 친근함을 함께 품은 채 옛 분들의 삶 속에 가까이 있던 호랑이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사라집니다. 일제는 주민과 가축에게 피해를 준다며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든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를 포함한 고양잇과의 생명마저 닥치는 대로 죽입니다. 곰과 늑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우리나라의 마지막 호랑이가 사살됩니다. 공식기록은 그렇습니다.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들리기는 합니다. 정말 살아남아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흔적을 통한 추정이며, 눈이나 진흙에 찍힌 소형 고양잇과의 발자국이 물이 고이는 등의 이유로 커지면서 오인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고양잇과의 희망은 삵 하나뿐입니다. 살쾡이라고도 불리는 삵은 고양이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크고, 진한 갈색의 반점이 많으며, 양쪽 눈 사이로 머리 위쪽에서부터 코까지 흰 무늬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야행성이지만 먹이가 부족할 때는 낮에 먹이 사냥을 나서기도 합니다. 주요 서식지는 삼림지대의 계곡과 큰 돌이 많은 곳, 하천 주변의 초지 등이며 나무도 잘 탑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삵 또한 흔히 만날 수 있는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쥐약이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쥐약에 중독된 동물을 삵이 다시 먹는 2차 중독에 의해 개체수가 급감하였으며, 지금은 멸종위기야생동물 Ⅱ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삵을 만나기 위해 섬진강 줄기에 움막을 짓고 오랜 시간 잠복한 적이 있습니다. 움막의 위치는 삵의 발자국을 3년 동안 살펴본 뒤 정했습니다. 삵이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방법은 없으니 눈이 와 쌓인 날이면 삵의 발자국을 샅샅이 추적하였고, 그중 이동 빈도가 가장 높은 곳에 움막을 지은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삵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33일째 날입니다. 어제는 움막이 무너지기 직전에 이를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움막 주변까지 삵의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지만 어두움에 기대 움직이는지라 낮의 긴 기다림은 차갑게 외면합니다. 꽤 추운 날인데도 해가 뜨자 움막에 쌓인 눈이 녹으며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어제 눈이 오기 시작할 때 뭐라도 덮었어야 했으나 게으름을 피웠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생겼습니다. 추운 날 옷으로 물까지 스며드니 무척 심란합니다. 움막을 허물고 제대로 다시 만들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갈등하고 있을 때입니다.

아, 삵이 드디어 얼어붙은 강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아직 셔터를 누르기에는 이릅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에 놀라 달아날까봐 숨도 죽입니다. 한참을 더 내려와 주어야 하는데 갑자기 멈춰 서더니 눈 덮인 덤불 쪽을 향해 몸을 돌려 앉은 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꺼운 눈 속으로도 먹잇감의 움직임을 감지한 모양입니다. 얼어붙은 듯 앉은 자세로 10분이 고스란히 흐릅니다. 드디어 등을 산 모양으로 굽히고 다리를 쭉 펴며 도약했다 곧바로 목표지점을 향해 몸을 덮칩니다. 사냥감은 눈 아래 덤불에 숨은 설치류였을 것 같은데, 입에 물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식동물의 사냥 성공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습니다. 환경과 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20%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삵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삵이 다시 이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정확히 움막 바로 정면에서 다시 멈춰 서더니 고개까지 나를 향해 돌려줍니다. 수상하기 그지없을 움막은 고마울 정도로 무시해버립니다. 33일 동안 텅 빈 강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선 눈앞에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이동로 중에 내 앞을 지나다 정확히 정면에 앉아까지 있어 주니 더 바랄 것이 없어야 마땅한데 바람은 멈추지 않습니다. ‘평소 밤에 다녔을 것처럼 언 강을 지나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와 줄 수는 없겠니?’ 아, 이런 날도 있습니다. 삵이 드디어 강을 건너 나를 향해 정면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부드러운 듯 강하게 들썩이는 어깨 근육은 압권입니다.

고양잇과의 마지막 자존심, 삵. 우리 땅에서 호랑이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표범도 스라소니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고양잇과의 마지막 자존심, 삵 하나만이 우리 땅에서 간신히 숨 쉬고 있습니다.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며 더불어 살고 싶은데, 그 길은 영영 없는 것일까요?

<김성호 | 서남대 의대 교수>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