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헐릴 뻔 한 빌딩에 감춰진 37년 전 진실…

댓글 8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헬기에서 공중 사격을 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에서 밝혀졌다. 광주시의 의뢰로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에 대해 조사를 벌인 국과수는 185개의 총탄 흔적을 발견·분석해 “헬기 사격이 유력하다”는 결론을 냈다.

경향신문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동구 전일빌딩 주변에 헬기가 떠 있는 모습./5·18기념재단 제공.


그동안 군은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의 여러 증언에도 불구하고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일축해 왔지만 이번 조사로 인해 재조사가 불가피해 졌다.

특히 광주시가 추가 발굴을 국과수에 의뢰키로 함에 따라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관총탄이 발견된다면 5·18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대량 살상을 위한 작전을 감행했다는 점을 밝힐 수 있게 된다.

■헐릴 뻔 한 빌딩에 감춰진 37년 전의 ‘진실’

경향신문

광주 동구 금남로에 있는 전일빌딩의 현재 모습./광주시 제공.


광주 동구 금남로 1가 1번지 ‘전일빌딩’.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바뀐 옛 전남도청 맞은편에 있는 10층짜리 이 빌딩은 하얀 페인트가 벗겨지는 등 한눈에 봐도 낡았다. 1968년 12월 7층 건물에 대한 사용승인이 난 뒤 4차례 증·개축을 거쳐 현재의 10층 빌딩이 됐다.

지금은 허름하지만 1980년에만 해도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전일빌딩은 광주의 상징이었다. 인근에 전남도청이 있고 길 하나 건너면 광주 최고 번화가였던 충장로 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빌딩 앞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기도 했다. 시민군은 계엄군에 쫓겨 건물 안으로 숨기도 했고 시민군들이 옥상을 지키기도 했다.

경향신문

1980년 5월 27일, 도청을 진압한 후 계엄군들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뒤편에 전일빌딩이 보인다./전남대 5.18연구소 제공.


하지만 이후 건물은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는 등 부침을 겪었다. 광주 도심이 외곽으로 확장되고 고충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위상도 예전만 못해졌다. 결국 빌딩은 2011년 법원 경매에 나왔다.

광주도시공사는 경매로 나온 건물을 136억원에 구입했다. 광주시와 도시공사는 건물을 헐고 당시 한창 공사 중이던 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한 시설을 새로 지을 계획이었다. 이런 계획이 알려진 이후 “5·18 현장인 전일빌딩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광주시는 전일빌딩을 헐기로 한 계획을 철회하고 리모델링해 사용하기로 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던 시는 지난해 9월 혹시 모를 5·18흔적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해 ‘5·18 총탄 흔적의 존재 여부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다.

경향신문

전일빌딩에서 총탄 흔적이 발견된 위치(빨간색 지점).


국과수 조사에서는 놀라운 반전이 나왔다. 전일빌딩 가장 꼭대기인 10층에서 5·18당시 헬기에 쏜 것이 유력한 총탄 자국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1980년 이후 별다른 리모델링 공사가 없었던 탓에 빌딩은 5·18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공중 정지 상태 헬기에서의 사격

광주시는 지난 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금남로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탄흔은 헬기에서 사격한 것이 유력하다’는 감정서를 받았다. 국과수는 3차례 조사를 벌여 건물 내부와 외벽에서 모두 185개의 총탄 흔적을 찾았다.

특히 맨 꼭대기 층인 10층 내부에서는 최소 150개 이상의 총탄 자국에 무더기로 확인됐다. 전일빌딩은 1980년 당시 인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국과수는 “수평 또는 하향 각도로 사격이 이뤄진 만큼 최소 10층 이상의 높이에서 사격한 것으로 판된되며 당시 전일빌딩 전면에는 10층 이상의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헬기와 같은 비행체에서 발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경향신문

광주시의 의뢰를 받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지난해 전일빌딩 외벼에서 총탄흔적을 찾고 있다./광주시제공.


특히 국과수는 기둥의 집중 사격 흔적 등을 근거로 “헬기가 호버링 상태(일정한 고도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고도만 상하로 변화하면서 사격한 상황이 유력하게 추정된다”고 밝혔다. 5·18민주화운동 37년 만에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헬기에서 총격을 가했다는 사실이 정부 기관의 공식 조사에서 확인된 셈이다.

헬기 총탄 흔적을 품고 있었던 전일빌딩은 이제 원형이 보존될 가능성이 커졌다. 광주시는 5·18단체와 협의 등을 거쳐 보존방안 등을 마련하고 5·18사적지로 지정할 수 있는 지를 검토하고 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헬기 기관총 사격’ 있었나

계엄군의 헬기 사격 사실이 확인된 이후 또 하나의 관심사는 당시 기관총 사격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헬기 기관총에 의한 사격이 확인된다면 군이 민주화를 요구했던 광주시민들을 ‘적(敵)’으로 간주하고 대응했다는 사실이 뒷받침된다.

국과수는 헬기에서 기관총 사격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당시 금남로 주변을 날아다닌 군 헬기는 UH-1과 500MD 2개 기종 이었다. 두 헬기는 모두 7.62㎜ 총탄을 사용하는 M60기관총이나 M134미니건 계열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일빌딩 주변을 낮게 날고 있는 헬기./5.18기념재단 제공.


국과수는 M134미니건 계열의 기관총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6열의 회전식 총열을 사용하는 이 기관총의 발사속도는 저속모드에서 분당 2000발 내외인 만큼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탄흔의 밀집 정도를 봤을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M60기관총이 사용됐을 가능성은 열어뒀다. 이 기관총은 UH-1헬기의 양쪽 문에 거치돼 사용된다. 국과수는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탄흔의 생성 방향이 한 지점에서 좌·우 방사형으로 펼쳐진 일정한 형태인데 이는 거치된 기관총 사격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기관총으로 사격을 했다는 여러 증언도 있다. 5·18당시 광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5월21일 오후 3시15분쯤 헬기가 거리의 군중을 쏘기 시작한 이후 병원에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경향신문

5.18당시 총탄흔적이 발견된 전일빌딩 내부. 탄흔이 확인되자 광주시는 보존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광주시제공.


고(故) 조비오 신부도 1989년 2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5월21일 오후 전남도청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헬기가 날아가면서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3차례에 걸쳐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다.

■진실 밝힐 ‘스모킹 건’, 남아있을지 모를 ‘탄환’

많은 증언에도 지금껏 국방부 등은 당시 헬기에서 시민들을 행해 사격을 가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1994년부터 5·18 관련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한 검찰도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는 결론을 냈다.

1995년 5월 피터슨 목사와 조비오 신부 등을 조사한 검찰은 그해 7월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검찰은 군 관계 자료상 실제 공중사격 실시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발견할 수 없고 기총사격으로 인한 대량인명피해와 피탄 흔적 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전일빌딩에서 대량의 탄흔이 발견되면서 검찰의 이같은 조사가 잘못됐다는 점도 드러났다. 헬기 사격에 사용된 총기의 종류는 앞으로 진행될 추가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지게 된다.

경향신문

지난해 진행된 국과수 조사에서 총탄흔적이 발견된 전일빌딩 10층./광주시 제공.


광주시는 전일빌딩 10층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추가 발굴을 의뢰하기로 했다. 광주시 관계자는 “관련 단체와 협의해 현장 훼손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뒤 10층 천장 전체를 조사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과수는 “총탄 흔적 등으로 볼 때 탄환이 천장과 마감재 사이 공간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전일빌딩은 1980년 이후 한번도 천장 공사 등을 진행하지 않아 현장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추가 발굴을 통해 기관총 탄환이 발견되면 군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할 수 있다. 5·18관련 단체들은 “정부와 군 당국의 자위권 발동 주장이 37년 만에 거짓으로 드러난 만큼 미흡한 진실 규명에 대해서 새 정부와 협력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