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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Why] 떳떳해서? 뻣뻣해서?… 최순실도 못 건드린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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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개 대기업서 774억 뜯어낸 비선실세가 말도 안 꺼낸 까닭

국정 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는 53개 대기업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명목으로 774억원을 뜯어냈다. 특히 정부 '입김'이 강한 포스코, KT나 민원이 많은 재벌을 상대로는 모금 외에 회사 인수와 인사 청탁 등 각종 이권을 챙겼다. 그런데 최씨가 접근하지 않은 대기업도 있다. 자금 사정이 넉넉한 KT&G와 농협중앙회 등은 아예 접촉하지 않았고 현대중공업 등에는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국정감사를 받는 공기업들도 기금 출연 대상에서 빠졌다.

자금 많아도 뻣뻣한 KT&G에는 가지 않아

2002년 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민영화된 KT&G는 실적 좋은 회사다. 5800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2015년 1조3600억원으로 배 이상 늘어났다. 1만5000원이었던 주가는 현재 10만원 안팎을 오르내리며 시가총액 17조원으로 코스피 시장 15~20위를 기록 중이다. KT&G보다 2년 먼저 민영화된 포스코는 주가가 한때 70만원을 웃돌았으나 지금은 20만원대 중반으로 쪼그라들었고 1년 먼저 민영화됐던 KT는 15년 새 주가가 반 토막 났다. KT&G 측은 "민영화 이후 해외시장 분야에서도 수익이 많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담뱃세를 통해 사실상 가격 결정권을 가진 기획재정부 등 정부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최고 실세였던 최씨 입장에선 이권을 챙기기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가진 기업이다.

하지만 KT&G 측은 "미르와 K스포츠재단이 기부금을 챙기던 재작년 말부터 작년까지 최씨나 재단 측에서 한 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했던 검찰의 한 관계자도 "최씨는 뒤탈이 우려되는 곳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최씨 측에서 '빨대'를 꽂을 만한 인사가 내부에 없었을뿐더러 자칫 강제 모금을 했다가는 잡음이 생길 수 있는 기업이 KT&G라는 것이다.

KT&G 최고 경영진은 박근혜 정권 내내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2013년 정권 출범 직후 경찰은 당시 민영진 사장을 겨냥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사장에 오른 민 전 사장이 연임에 성공한 직후였다. 이 사건에 연루됐던 민 전 사장 등 회사 임직원 6명은 이듬해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1년 뒤인 2015년 KT&G는 다시 수사를 받았다. 이번엔 최정예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수사를 담당했다. 두 번씩이나 수사를 받게 된 민 전 사장은 사표를 제출했고 6개월간 수사를 받다 구속됐다. 재임 시절 협력업체와 회사 관계자, 해외 바이어에게 청탁을 받고 현금과 명품 시계 등 금품 1억7900만원어치를 챙긴 혐의였다. 하지만 민 전 사장은 작년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에서 각종 명목의 금품 수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민 전 사장으로 끝날 줄 알았던 수사는 예상을 깨고 계속됐다. 검찰은 민 전 사장 후임인 백복인 사장에 대해서도 취임 5개월 뒤인 작년 3월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되자 검찰은 그제야 백 사장을 불구속 기소하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검찰 안팎에선 "현 정권에 밉보인 기업인을 찍어내기 위한 수사였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 전 사장뿐 아니라 신임 백 사장 역시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민 전 사장이 사표를 내자 후임 사장으로 청와대 등은 백 사장이 아니라 다른 후보를 원했다고 한다. KT&G는 사외이사 등으로 구성된 사장후보추천위원회가 사내외 공모를 통해 사장 후보자를 내정한다. 당시 청와대와 경제 부처 등에선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의 미국 대학 동문인 외부 인사를 신임 사장으로 밀어달라고 사장후보추천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KT&G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밀었던 후보는 결격 사유가 적지 않았다"면서 "사장 선임에 계속 개입하면 그 내용을 폭로하겠다는 사장후보추천위원도 있었다"고 했다.

KT&G는 민영화 이후 정치인이나 관료 등 '낙하산' 사장이 부임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백 사장도 1993년 입사 이후 전략, 마케팅 부서 등을 거친 내부 승진자였다. 따라서 용도가 불투명한 자금 모금을 추진했던 최씨나 안 전 수석 입장에선 고분고분하지 않은 KT&G에는 아무리 챙길 이권이 많다 해도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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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등은 형편 어려워 모면

최씨 측은 400조원대 자산을 굴리는 농협중앙회에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두 재단 측에서 기부를 요청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농협중앙회는 작년 1월 회장이 바뀌었다. 8년간 재임했던 최원병 회장이 물러나고 김병원 회장이 대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최 전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동지상고 동문으로 지난 정부 실세들과 친분이 깊었던 반면 현 정부와는 인연이 많지 않았다. 호남 출신 첫 민선 농협 회장이 된 김 회장은 선거 당시 현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청와대는 영남권의 다른 후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김 회장은 당선 직후 부정선거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며, 작년 7월 불구속 기소됐다. 법원에서 100만원 이상 벌금형이 확정되면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러자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와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편파적인 수사를 한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수뇌부가 정권과 거리를 둔 농협중앙회 역시 최씨 측이 기부금을 강요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농협 한 관계자는 "MB 정부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최고 경영진이 정부와 워낙 가까워 실세가 주도하는 모금이라면 기꺼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아 위기를 모면한 대기업도 있다. 오랜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그렇다. 현대중공업은 오너가 있는 10대 재벌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최순실 게이트'를 피했다. 당초 최씨 측은 현대중공업에도 기금 출연을 요청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재무 상황이 너무 나빠 줄 돈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요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과 2015년 각각 3조원과 1조원이 넘는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한때 5위를 기록했던 이 회사 시가총액이 30위 밖으로 밀려나는 설움을 겪을 때였다. 현대중공업과 함께 세계 조선업계를 주름잡았으나 지금은 불황에 시달리는 대우조선해양의 경우는 최씨 측이 아예 기금 요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우조선 정성립 사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최씨에게 재단 모금과 관련해 어떠한 요청도 받은 바 없다"고 했다.

국정감사 받는 공기업도 제외?

최씨는 국내 자산 규모 2위와 4위인 한국전력이나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공기업과 시중은행에도 기금 출연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기업은 정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지만 국회 국정감사 대상이어서 출연 기금이 잘못 사용되면 야당 등에 들킬 가능성이 높으며, 시중은행들은 자산의 상당 부분이 고객 돈이기 때문에 각종 성금이나 기부에 제약이 많은 편이다. 일각에선 최씨와 안 전 수석 등이 재단 기금 출연 대상 기업을 사전에 기획·선정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뒤탈이 예상되거나 뻣뻣한 기업은 처음부터 모금 대상에서 제외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씨는 현안이 많고 약점이 있는 재벌 기업이나 대표 임면권이 사실상 정권에 있었던 포스코나 KT를 상대로는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이권을 챙겼다. 최씨는 포스코를 상대로 재단 출연금 49억원을 받아내고 광고 계열사를 강탈하려 했으며, 펜싱팀을 창단해 최씨가 운영하는 더블루케이가 펜싱팀 매니지먼트를 맡는 약정을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포스코는 전임 정준양 회장 선임 과정에 정치권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현 권오준 회장도 최씨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회장 교체기마다 정치권 개입 논란이 있다. 최씨는 KT를 상대로 18억원 기금을 출연받은 것 외에도 가까운 인사를 임원으로 취직시키고 자신이 실소유한 회사에 68억원 규모 광고를 받아냈다.

검찰 관계자는 "대통령 해명처럼 '문화 융성'의 좋은 취지라면 공개적으로 모금하면 되지 기업 상황 봐가면서 돈을 받아낸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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