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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부결 유력…렌치 총리, 충격의 대패(종합2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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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방송 출구조사 결과…伊, 英美 이어 포퓰리즘 도미노 3번째 희생양 되나

伊정치지형 격변 불가피…제1야당 오성운동·극우 북부리그 영향력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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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렌치 총리[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상·하원에 동등한 권한을 부여한 현행 헌법을 고쳐 상원의원 수를 줄이고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4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치러진 개헌 국민투표의 출구조사 결과 반대가 54∼59%로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공영방송 RAI와 LA7 등 이탈리아 방송사는 이날 밤 11시(현지시간) 투표가 마감된 뒤 발표한 출구조사에서 이처럼 국민투표가 부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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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조사에서 국민투표 부결이 전망되자 얼굴을 감싼 렌치 이탈리아 총리
[EPA=연합뉴스]



이탈리아 국민투표 부결은 렌치 총리가 제시한 정치 개혁 명분이 포퓰리즘과 극우 성향의 야당들이 기성 정치인에 대한 심판론을 내세우며 좌절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반(反) 이민·반 세계화 정서를 자양분으로 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이은 포퓰리즘의 승리 사례로 평가된다.

출구조사 결과가 실제 개표 결과와 들어맞으면 마테오 렌치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국민투표에 부친 개헌안은 폐기되고, 이탈리아의 양원제는 현재와 똑같이 운영된다. 렌치 총리는 총리 취임 2년 9개월 만에 사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집권 민주당과 렌치 총리 대한 지지도가 높은 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이번 국민투표 투표율이 이례적으로 높은 반면, 개헌안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은 남부의 투표율은 저조하다는 소식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렌치 총리는 최대 약 20%나 뒤진 출구 조사 결과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렌치 총리는 2007년을 정점으로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이탈리아의 경제 침체가 정치 불안정과 관료제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어렵다고 보고 개헌안을 마련해 작년 말과 올해 초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통과시켰으나 최종 국민투표 관문을 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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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부결될 듯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부결될 듯 (로마 AP=연합뉴스) 4일(현지시간) 실시된 이탈리아 개헌안 국민투표 출구조사 결과 반대가 54∼59%로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 것으로 집계돼 부결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개헌안은 상·하원에 동등한 권한을 부여한 현행 헌법을 고쳐 상원의원 수를 줄이고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개혁을 내세우며 마테오 렌치 총리가 제시한 개헌안이 부결되면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이은 포퓰리즘의 세번째 승리 사례로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이날 국민투표를 하고 있는 렌치 총리의 모습.



렌치 정부가 제시한 개헌안은 상원의원을 현행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입법권과 정부 불신임권 등 핵심 권한을 없애는 등 상원의 대폭 축소와 함께 중앙 정부 권한 강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양원제를 채택한 나라로는 유일하게 상원과 하원이 입법 거부권과 정부 불신임권 등 동등한 권한을 지닌 이탈리아의 정치 체계는 양원이 정부의 입법안을 주고 받으며 입법을 지연하거나 차단해온 탓에 정치 불안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돼 왔다.

정치 체계를 간소화하고, 비용을 줄임으로써 2차 대전 후 공화정이 들어선 이래 70년 동안 63개의 정부가 바뀐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해소하고, 정치 안정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저성장에 빠져있는 이탈리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명분으로 추진됐다.

이탈리아는 2009년 불거진 남유럽 재정위기 이후 경제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으며 작년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0년 전인 1997년과 엇비슷한 3만3천 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에 대해 집권 민주당의 일부 거물급 인사를 비롯한 비판론자들은 상원의 축소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손상시킴으로써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총리에게 너무 큰 권력을 쥐여 줘 이탈리아에 파시즘의 악몽을 가져온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를 출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부가 주장하듯 비용 감소의 효과도 크지 않고, 오히려 정치 체계에 혼란만 일으킬 것이라며 반대했다.

특히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을 필두로 한 야당들은 렌치 총리가 투표 결과를 자신의 거취와 연결짓자 이번 투표를 더딘 경제 회복, 고착화된 실업난, 난민 대량 유입 등 렌치 정부의 실정을 심판하는 투표로 몰고 가며 국민투표의 실익에 대한 국민적 논의는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렸다.

렌치 총리는 국민투표가 부결되면 물러나겠다고 누차 이야기한 바 있어 5일 중으로 세르지오 마타렐레 대통령을 만나 사임 의사를 밝히는 등 사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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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민투표 개표 [AFP=연합뉴스]



하지만 그가 즉각 물러날 경우 이탈리아 금융 시장과 세계 경제에 닥칠 후폭풍을 우려하며 렌치 총리의 사퇴를 만류하거나 내년 상반기 중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조기 총선까지 이끌 과도 정부의 수장을 맡아달라고 제안할 가능성도 있다.

예상보다 큰 패배에 자존심 강한 렌치 총리가 이를 거부하고 끝내 사임하면 당분간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이는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고 존립을 위협받고 있는 취약한 이탈리아 은행에 직격탄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또, 이탈리아를 넘어 유로존과 세계 경제에도 단기 충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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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AFP=연합뉴스) 개헌안 반대 진영.



과도 정부의 수장을 맡을 렌치 총리 후임으로는 현재 렌치 내각에서 재무 장관을 맡고 있는 카를로 피에르 파도안 장관이나 피에트로 그라소 상원의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국민투표 부결로 이탈리아 정치 지형의 격변도 불가피해졌다.

국민투표에서 예상보다 큰 격차로 패할 경우 민주당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는 반면 개헌안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 포퓰리즘 성향의 제1야당 오성운동과 반(反)이민, 반 유럽연합(EU)을 주장하는 극우 북부리그(NL)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탈리아 현행 선거법 상으로는 내년에 치러질 조기 선거를 통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회의적인 오성운동이 집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이탈리아의 이번 국민투표 결과에 EU의 우려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성운동이 유로존 3위 경제 대국인 이탈리아의 유로존 잔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탈리아가 유로존을 떠나는 이탈렉시트(Italexit)가 현실화하면 EU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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