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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취재파일] 2016년, 두 명의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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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커뮤니티에 사진 2장이 올라왔다. ‘두 1996년생.jpg’라는 제목이었다. 사람들은 댓글을 많이 달았어도 그 댓글에서 말을 길게 잇지는 못했다. ‘안타깝다’, ‘할 말이 없다’, ‘슬프다’ 그리고 여러 개의 욕설. 누군가는 올해 2016년이 이 2장의 사진으로 요약되는 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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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을 하루 앞둔 그날 일어난 일

첫 번째 사진의 주인공은 김 군이다. 1997년에 태어난 김 군은 (커뮤니티 게시 글에서는 김 군이 1996년생이라며 사진이 올라왔지만 실제 김 군은 1997년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대학은 나중에 가겠다며 우선은 취업을 먼저 해 집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단다. 1백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쪼개 적금도 부었고, 그 와중에 동생에게 용돈도 줬다. 취업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지쳐 쓰러져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지 7개월 남짓 지난, 김 군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 김 군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사고 때문이었다. 스크린도어 정비 용역 업체 직원이었던 김 군은 고장 난 스크린도어 점검을 하다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세상을 떠났다.

작업은 2인 1조로 진행할 것, 역에 출동할 때는 출동사실을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통보할 것 등 안전 수칙은 있었다. 하지만 그 수칙을 지켜야 하는 주체는 항상 김 군과 같은, 용역 업체 직원 개인이었다. 시간에 쫓겨 가며 3교대로 근무하는 업체 직원이 2인 1조로 현장에 애초에 갈 수가 없는 환경이라는 것도, 정비 업체 직원이 역무실에 들어와 스크린도어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나와 선로에 가기까지 역 직원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도 처음엔 그 허울뿐인 수칙 뒤에 모두 가려졌다.

● “이제 둘째 아이에게는 책임감 가르치지 않겠다”

“저요, 우리 아이 기르면서 항상 책임감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어요. 저 절대 우리 아이 잘못 키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앞으로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습니다.”

김 군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아이를 잘 키우려면 책임감 있고 성실하라고 가르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기자 앞에서 자책했다. 자식이 죽었어도 억울한 걸 알리려면 정신도 차리고 인터뷰도 하고 말도 잘 하라고 주변에서 말했다며 애써 의연하게 카메라 앞에 섰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컵라면도 하나 못 챙겨먹고 결국 굶어서 죽은 것 같다”며 결국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아들이 들고 있었던 가방 속 내용물 이야기를 하고서였다. 작업에 필요한 각종 공구와 기름때가 묻은 장갑 사이로, 컵라면 하나와 채 비닐봉지로도 감싸지 못한 숟가락 하나, 나무젓가락 하나가 있었다. 바쁘게 일을 다니다 잠시 짬이라도 나면 먹으려고 항상 준비했던 걸까. 사고가 났던 구의역 승강장에는 그 이후 김 군을 기억하는 수많은 쪽지가 나붙었다. 누군가가 정성껏 싸 온 3단 도시락도, 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따뜻한 쌀밥과 고깃국도 놓였다.

●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

6개월 남짓 시간이 흐른 지난 9일, 김 군의 죽음에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두고 진행됐던 경찰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서울메트로와 스크린도어 수리 용역업체인 은성PSD 관계자들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관리 감독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모두 14명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용역업체 은성PSD 대표 등은 직원들이 2인 1조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고 홀로 작업하는 걸 그대로 묵인했고, 오히려 2명이 작업한 것처럼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구의역장 등 역무원들도 김 군이 왜 무슨 작업을 하러 온 건지 등을 확인하지 않았다. 스크린도어 장애 신고를 받은 역무원은 심지어 사고 전까지 관련 부서에 고장 사실을 보고하지도 않았다. 서울메트로 전 사장 등 고위 관계자들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해 함께 입건됐다.

수사가 일단락됐지만 김 군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여전히 일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몸이 쇠약해진 어머니는 계속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단다. 자기 꿈을 미뤄두고 취업을 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을 했고, 그러면서도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어 했던 아들은 이제 더 곁에 없다. 다니던 회사가 곧 서울메트로 자회사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에, 그럼 월급도 오르고 ‘준 공무원’이 된다는 말에, 김 군은 힘들어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뭘 해도 운이 좋다’며 격려해 줬다고 했다. 사고 뒤 ‘그게 참 바보 같았다’며 어머니는 자책했지만, 그게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이웃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기도 했다. 꿈을 잠시 접어두기도 하고, 일이 고되지만 월급이 오를 거라는 기대에 참기도 하고, 하는 일은 계속 고되어도 좀 더 안정적이라고들 하는 공무원 신분을 꿈꾸기도 하고. 그건 큰 욕심이 아니었다. 평범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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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풍파 견뎌낼 나이 아니다?

‘조금만 더 나아질 수 없을까?’ 큰 욕심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 작은 바람이 이뤄질 수 있을지 때로는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인다. 하지만 두 번째 사진의 주인공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김 군은 그러지 못했나. 두 사진을 본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은 그렇게 분노로 무너졌다.

1996년생으로 알려진 정유라 양이 두 번째 사진의 주인공이다. 국정농단 사건의 주인공으로 구속 기소된 최순실 씨의 딸이다. 굳이 여기서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언론 등을 통해 밝혀진 최 씨와 정 양,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삶은 뭔가 달랐다. 정 양을 둘러싸고 사람들을 가장 먼저 분노하게 했던 건 바로 대학에서 누렸던 특혜였다. 이화여대에 입학한 정 양은 제대로 수업에 출석도 하지 않았고 과제물도 내지 않았다. 입학부터 문제였다. 다른 지원자들과는 달리 정 양은 버젓이 금메달을 들고 면접에 들어갔다. 나머지 모든 절차는 학교 측 입학 관계자들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불거진 의혹에 교육 당국이 감사에 나섰다. 정 양이 받은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 및 학사 관리 특혜는 상상을 초월했다. 학교생활뿐이 아니었다. 강원도에 있는 땅을 담보로 정 양은 기업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신용장을 발급받아 거액을 대출받았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자 어머니 최 씨는 귀국했고 검찰 조사 끝에 구속 기소됐지만, 아직 정 양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정 양을 두고 최 씨의 변호인은 “우리 사회가 정 씨의 상황을 이해할 만한 아량이 있지 않느냐”며 감쌌다. “어느 정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낼 만한 나이 같으면 모르겠다”라고도 했다.

● 그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

‘개입하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르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최 씨의 국정농단 의혹은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에도 회가 거듭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직 미성년자인 학생들 또는 2·30대들이다. 선거 때마다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하며 현실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아왔던 사람들이다.

“저희가 내신 준비를 하고 수능 공부를 할 때 정유라 씨는 뭐하셨나요? 전형을 ‘만들어서’ 입학했습니다.”

“공부도 사실은 꿈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는데, 열심히 공부해봤자 대통령하고 친하면 다 성공하는 이런 상황이 공정하지 못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꿈을 꿀 수 없고 배우는 것과 너무 괴리가 커서.”

“그 동안 배웠던 게 ‘열심히 살면 보상은 돌아온다’였는데 정유라 씨가 돈으로 배경으로 보상을 받는 것을 보고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다른 불공정한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2·30대 역시, 정당성이 없는 이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좌지우지해온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아등바등하며 부속품처럼 쓰였다는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잘 좀 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태어나든가.” 이 말이 그저 영화 속 대사가 아니라 실제 우리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화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사람들이 느꼈던 박탈감과 무력감은 극대화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커질 대로 커진 감정이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앞서 말했듯 누군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두 명을 담은 이 사진이 2016년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고 말한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개인이 노력했어야 한다는 지적, 하지만 결국 드러난 시스템의 문제, 그럼에도 한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현실, 소위 흙수저와 금수저로 통칭되는 계급까지. 구의역 사고 취재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최근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였다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이다.

* 실제 기자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게시 글에서 두 번째 정유라 씨에 해당하는 사진은, 한 언론이 정유라 씨를 두고 불거진 의혹을 정리한 도표를 캡처한 이미지였습니다. 두 명의 20대를 보여주려 했다는 의도를 좀 더 반영해, 이 글에서는 두 번째 사진을 정유라 씨 개인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박하정 기자 parkh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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