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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두 번의 지시 뒤 사라진 ‘대통령의 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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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월호 참사 당일 두 번의 지시 뒤 7시간동안 아무 지시 없어

오후 5시께 재난본부 나타나 “구명조끼 입었는데 발견 힘드냐”

법원 ‘정윤회 안 만났다’ 결론냈지만 청 출입기록 믿을 수 없어

최근 방송에서 ‘피부과 시술 의혹’ 다뤄 다시 논란의 중심으로



세월호 사고 부실 대응을 상징했던 이른바 ‘7시간’이 국정농단 사태의 주인공이 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인터넷 매체 <고발뉴스>는 ‘박 대통령, 세월호 참사 당일 피부과 시술 의혹’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과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7시간’과 연관된 듯한 ‘성형외과’ 관련 보도를 했거나 예고 중이다.

국정농단 사태를 겪은 뒤 국민들은 ‘7시간’을 비선에 의해 농락 당해온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적인 국정운영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취임 후 가장 급박했던 그때 박근혜 대통령은 왜 두번째 지시(오전 10시30분)를 끝으로 단 하나의 추가 지시도 내리지 않았을까. 왜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가 위기 상황에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답했을까.

검찰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을 구속했고 9일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과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이들 ‘문고리 3인방’은 박 대통령의 식사까지 챙길 정도로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해왔다. 어쩌면 정 전 비서관 전화기의 수많은 녹음파일에 ‘7시간’의 비밀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날’에 관한 가장 상세한 공개 기록인 가토 다쓰야 전 일본 산케이신문 지국장의 1심 판결문, 2014년 7월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록 등을 통해 ‘7시간’을 더듬어보자.

한겨레

세월호 참사 발생 다음날인 2014년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이 가족들 대기장소인 전남 진도체육관에 도착하여 탑승자 가족을 위로하고 애로사항 이야기를 듣던 중 한 가족이 무릎을 꿇고 배안에 있는 가족을 살려달라고 빌고 있다. 진도/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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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두 번의 지시…오전 10시30분을 마지막으로 그나마도 끊겨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전 10시 첫 보고를 받았다. 청와대 국가안보실 김장수 실장의 서면보고였다. 사고 발생 1시간 11분이 지났을 때였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서남방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사고가 나서 지금 침수가 되고 있다. 학생 등 약 500명 가까운 승객이 타고 있다. 현재 구조 세력들이 이동하며 일부는 도착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구조 세력이 도착하고 구조 활동이 지금 진행이 되고 있다. 56명이 구조됐다.”

오전 10시15분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이 전화로 두번째 보고를 했다(유선보고). 이때 박 대통령은 첫 지시를 내린다(오전 10시15분. 하지만 해경 본청 통화 내역에서는 오전 10시25분 청와대와 해경본청 상황실이 통화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오전 10시15분, 세월호는 선내에 물이 차오르며 약 90도까지 기운 상태였다.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은 “약 80도 정도이기 때문에 저희 경찰 다 나왔습니다. 현재 90도입니다. 완전 뭐 여객선이 약 95도…”라며 ‘구조 철수’를 보고했다.

오전 10시22분 다시 보고가 올라갔다. 청와대는 ‘오전 10시30분 박 대통령이 김석균 해경청장에게 직접 전화로 두번째 지시를 내렸다’고 발표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과 장비, 또 인근의 모든 구조 선박까지 신속하게 총동원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 해경 특공대도 투입해서 여객선의 선실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서 단 한 사람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이 지시는 이날 박 대통령의 ‘사실상 마지막’ 지시였다. 같은 시각,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했다. 배가 기울어진 오전 8시49분부터 101분 만이었다. 구조된 인원은 172명이었다. 304명이 희생됐다.

그 뒤로도 보고는 계속 올라갔다. 오전 10시36분, 오전 10시40분, 오전 10시57분, 오전 11시20분, 오전11시23분, 오전11시28분, 낮 12시5분, 낮 12시33분, 오후 1시7분, 오후 1시13분, 오후 2시11분, 오후 2시57분, 오후 3시30분, 오후 5시11분. 박 대통령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총 14번의 보고가 올라갔다.

배가 완전히 침몰했기 때문에 더이상 지시할 게 없었기 때문일까. 박 대통령은 아무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5시15분 중앙재난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내 이렇게 말했다.



“지금 5시가 넘어서 일몰 시간이 가까워오는데 어떻게든지 일몰 전에 생사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드러난 사실은 청와대 안보실과 비서실에서 ‘보고를 했다’는 점뿐이다. ‘보고를 받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대면보고가 있었다면, ‘보고를 했다’와 ‘보고를 받았다’는 같은 뜻이 된다. 그러나 그날 오후 5시15분 중앙재난대책본부에 박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면보고는 한차례도 없었다. 박 대통령은 왜 단 두번의 지시만 내렸을까. 아니, 오전 10시30분 이후에 올라온 보고를 받긴 받았을까. 급박한 국가 위기 상황에 왜 그는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을까.

■ 박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그날 박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에 앞서 ‘그날 박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라는 기초적인 질문에도 우리는 아직 답을 모른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두번째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면서 “심지어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밝혔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다.

의혹에 불을 댕긴 건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2014년 7월7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4월16일 날 오후에 중앙대책본부에 가실 때 제가 수행해 갔습니다.(청와대에서는 못 뵈었습니까?) 청와대에서는 그날 뵌 일이 없고 그때 모시고 가느라….” 국회가 발칵 뒤집힌 건 당연했다. 박영선 위원(새정치민주연합)이 나섰다.



-‘대통령께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서면보고로 10시에 했다’라는 답변이 있었지요?

“예.”

-이때 대통령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것은 제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러니까 대통령께서 어디에 계셨는데 서면보고를 합니까?

“대통령께 서면보고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왜 서면보고를 하지요?

“아마 정확한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럼 대통령께서 집무실에 계셨습니까?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비서실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아십니까?

“비서실장이 일일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이 이날 일정이 없었던 것으로 저희가 알고 있는데요. 집무실에 안 계셨다는 얘기지요, 지금?

“그렇지 않습니다.”

-집무실에 계신데 왜 서면보고를 하나요?

“집무실도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서면으로 많이 올립니다.”

-이 부분은 지금 답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실장님.



윤후덕 위원(새정치민주연합)도 물었다.



-사고가 확인된 상태에서 대통령님은 어디 계셨어요? 집무실에 계셨어요, 아니면 관저에 계셨어요?

“저희들은 출퇴근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경내에 계시면 어디든지가 대통령 집무실입니다.”

-그러니까 집무실에 계셨는지 관사에 계셨는지 그것을 여쭙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비서실장 어떻게 합니까?

“청와대 내는 경호의 원칙상……”

-그러면 경호실차장, 대통령 그때 어디 계셨어요? 집무실에 계셨어요, 관저에 계셨어요?

“저희는 경호, 대통령님의 안전을 책임질 뿐이지 일정과 동선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부서가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어디에 있었나. 집무실인가, 관저인가. 아니, 청와대 안에는 있었나?

한겨레

박근혜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사고가 일어난 2014년 4월16일 오후 5시께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전남 진도해상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사고와 관련 상황 보고를 듣고 있다.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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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 제3자와 만났나

정답이 없으니 소문이 무성해졌다. 대표적인 소문이 그날 박 대통령이 정윤회씨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칼럼에 적었다가 재판에 넘겨진 가토 전 지국장 사건의 1심 재판부는 ‘박 대통령과 정윤회씨는 그날 만나지 않았다’고 결론냈다.

핵심 근거는 대통령 경호실이 제출한 ‘출입기록’이다. 판사는 “대통령 경호실이 2014년 8월13일 작성한 ‘출입기록 확인요청 답변 공문 1부’를 보면, 정윤회가 2014년 4월16일 청와대에 출입한 기록이 없다고 기재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한겨레>는 이른바 ‘비선’들이 출입기록을 남기지 않고 청와대를 드나들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 1일 ‘최순실씨가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청와대를 수시로 출입했다. 검문·검색을 받지 않아 출입기록이 없다. 마찰이 있어 경호 책임자들이 좌천당했다’는 보도다. 검찰도 이 의혹에 대해 “수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적어도 경호실이 제출한 출입기록만으로는 이 소문을 잠재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날 확인된 정윤회씨의 객관적 위치는 단 두 곳이다. 판결문을 보면, 정씨는 ‘7시간’ 전후로 세번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오후 2시20분 서울 종로구 평창동 158-1 글로리아타운 인근(①)에서, 오후 3시30분 강남구 신사동 637-15 인근(②)에서, 오후 5시36분 신사동 같은 장소(②)에서다. ①과 ②는 15㎞ 거리로, 차로 이동하면 45분쯤 걸린다.

정씨가 오후 2시20분 전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선 오락가락하는 정씨의 진술만 있다. 정씨는 검찰 조사에서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었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관이 ‘당신 휴대전화 사용 내역을 보니 오후 2시20분께 평창동에 있었는데?’라고 묻자 ‘평창동 한학자 이세민씨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고 말을 바꿨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박 대통령은 왜 단 두번의 지시만 내렸을까. 아니, 오전 10시30분 이후에 올라온 보고를 받긴 받았을까. 박 대통령은 그날 어디에 있었나. 집무실인가, 관저인가. 그것도 아니면, 청와대 밖에 있었나? 박 대통령은 그날 무엇을 했나. 이 많은 질문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의혹이 커지고, 소문은 커진 의혹을 타고 나풀거린다. 그중 어떤 ‘소문’은 ‘진실’이 되어 국정농단 사태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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