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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미국이 ‘쿠바 제재 해제’에 ‘기권’한 까닭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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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한겨레

조일준
국제에디터석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지난 26일(현지시각) 유엔 총회에선 193개 회원국 모두가 참여한 표결이 있었습니다. ‘쿠바 경제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결의안이었습니다. 법적 구속력도 없는 이 표결의 결과를 세계 언론은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미세하지만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찬성 191, 반대 0, 기권 2. ‘반대’가 단 1표도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만장일치였습니다.

기권 2표를 던진 건 어느 나라일까요? 미국과 이스라엘입니다. 이 두 나라는 맨 처음부터 지난해까지 일관되게 ‘반대’표를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기권’으로 돌아선 겁니다. 1992년부터 올해까지 25년째 표결에서 한번이라도 ‘반대’표를 던진 전례가 있는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빼곤 6개국뿐입니다. 그나마도 ‘어쩌다 한두번’이었습니다. 이 표결에서 가장 많은 반대표가 나왔던 게 고작 4표입니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아니 그보다 미국과 쿠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이걸 설명하려면 먼저 60여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59년 1월1일, 피델 카스트로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청년 좌파 혁명가들이 이끄는 무장투쟁단체 대원들이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강고해 보였으나 부패하고 무능했던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은 신념에 찬 게릴라 전사들에게 맥없이 무너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을 선언했다. 이후 반세기 넘게 이어질 미국과 쿠바의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제가 2015년 1월 <한겨레21>에 썼던 기사의 한 대목입니다.

미국은 턱밑 카리브해 국가에서 일어난 좌파 혁명에 경악했습니다. 당시는 세계 질서가 미국과 소련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냉전 대결’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때입니다. 미국은 ‘쿠바 혁명’이 일어난 지 꼭 3년 뒤인 1962년 2월부터 국제사회의 쿠바 제재를 주도합니다. 사탕수수를 비롯한 농수산업으로 먹고사는 작은 섬나라를 철저하게 고립시켜 항복을 이끌어낸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쿠바는 반세기가 넘도록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올해 처음으로 ‘쿠바 제재 해제’ 결의안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미국과 쿠바는 해빙 분위기입니다. 앞서 2014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각각 워싱턴과 아바나에서 ‘두 나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중대 성명을 동시에 발표했습니다. 18개월에 걸친 비밀협상의 결실이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리는 수십년 동안 미국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실패한 낡은 쿠바 정책을 끝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실무적인 복구 절차가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번 유엔 결의안의 표결 결과도 그 연장선입니다.

서맨사 파워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26일 결의안 표결에 앞서 미국의 ‘기권’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좀 길지만, 연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은 항상 이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져왔습니다. 오늘 미국은 기권할 겁니다. (청중 박수)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 제재를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면서 의회에 필요한 조처를 요구했습니다. (…) 오늘 표결은 왜 미국의 ‘쿠바 고립’ 정책이 통하지 않았고 나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명징한 사례입니다. 그동안 미국의 정책은 쿠바를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미국을 고립시켰습니다. 오바마 정부 들어 우리는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은 쿠바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며 조건도 달았습니다. “오늘 미국의 기권이 쿠바 정부의 모든 정책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 쿠바 국민도 기본적 인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미국 중심의 인권 개념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 인권이기 때문입니다.”

파워 대사는 2014년 아프리카에서 발병해 전세계를 긴장시킨 ‘에볼라 사태’ 때 쿠바 의료진이 보여준 헌신과 활약을 극찬하는 것으로 연설을 끝맺었습니다. 수사법의 복선입니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쿠바의 숭고한 노력은, 미국과 쿠바 사이에 여전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계속 국제사회의 문제에 협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를 위한 또하나의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미국이 마침내 ‘쿠바 제재’를 단호하게 해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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