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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MLB 벼랑 끝에서 ‘과거’가 그를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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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볼티모어 오리올스 김현수


초심.
긍정.
긍정. 인내. 노력. 초심.
don’t give up. and never give up.
忍.
忍忍忍.
All fortune is to be conquered by bearing it.

김현수(28·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카카오톡 소개 문구는 올해 이런 흐름으로 바뀌었다. 메이저리그 첫 스프링캠프 참가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타격 성적이 잘 나지 않을 때는 ‘긍정’과 ‘인내’로 버티면서 초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잘 안 풀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개막 뒤에는 ‘참을 인’(忍)을 거듭 새겼다. 마이너리그 강등 거부권을 썼다는 이유로 개막전에서 원정팬이 아닌 홈팬들에게 야유를 듣고 마냥 벤치에 앉아 출전 기회를 기다리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참는 것’,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야유를 칭찬으로 바꿔놓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야유’로 시작된 2016 시즌

메이저리그 첫 시즌 타율 0.302(305타수 92안타), 6홈런 22타점. 시즌 초반 결장과 플래툰 시스템 때문에 간헐적인 타격 기회만 있던 것을 고려하면 꽤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볼티모어 지역지인 <볼티모어 선>은 “김현수는 개막 뒤 6~7주 정도 벤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김현수는 볼티모어에서 가장 많이 뛴 좌익수가 됐다”며 “출루율 0.381은 주전 선수들 중 2008년 닉 마케이키스(0.406) 이후 최고의 성적”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김현수의 인내심, 그리고 콘택트 위주의 타격 기술은 볼티모어에 필요했던 요소”라고도 했다.

‘야유’로 시작된 2016 시즌. 메이저리그 벼랑 끝 무대에서 그는 어떻게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극적인 반전을 이뤘을까. 김현수의 ‘과거’에 답이 있다. 두산 시절 김현수를 곁에서 지켜봤던 장원진 타격 코치는 “메이저리그 데뷔 초반의 마음고생은 현수가 지금껏 해왔던 것에 비하면 그리 큰 시련은 아니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시범경기 8안타, ‘재앙’이라 불려
벤치 지키며 타격 훈련 매달려
첫 시즌 타율 0.302, 출루율 0.381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 만들어내”

고교 3년 타율 0.427 청소년대표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명 못 받아
“그때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매일 스윙 1000번씩 하며 담금질


한겨레

올해 들어 상황마다 여러 차례 달라진 김현수의 카카오톡 소개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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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는 손해를 본 게 좀 있었어요. 그때 신일고가 대회를 너무 빨리 끝냈죠. 처음에는 스카우트들이 현수를 뽑으려고 했는데 신일고가 대통령배(4월), 청룡기(5월)를 나가고 남은 두 대회(황금사자기, 봉황기)를 안 나가는 바람에 나중에 두 대회를 통해 튀어나오는 선수들 때문에 현수는 자연스레 잊혔어요. 방망이가 좋았다고는 하지만 투수 앞에서 원바운드로 중견수 쪽으로 가거나 1, 2루 사이를 통통 튕겨서 나가는 안타가 많았어요. 장타보다는 단타를 때리는 선수였기에 강한 인상을 주는 선수가 아니었던 거죠.”

신일고 3학년 때 김현수를 지켜봤던 이복근 두산 베어스 스카우트 팀장의 말이다. 김현수는 신일고 3년 동안 타율 0.427(89타수 38안타), 1홈런 19타점을 기록했다. 고교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청소년대표팀으로도 뽑혀 활약했지만 그는 2005년 8월말 열린 2016 신인 드래프트에서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3학년 때 타율(0.307·54타수 20안타)이 떨어진 것도 한 요인으로 보인다. “그때 당시 스카우트들 얘기는 현수 어깨가 약해서 외야는 힘들고 1루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1루수면 장거리 타자이거나 힘이 있어야 하는데 현수는 아니었던 거죠.”(이복근 팀장)

당시 신인 드래프트 현장에는 김현수의 부모님만 참석했다.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합숙을 하던 터라 김현수는 인천의 한 피시(PC)방에서 청소년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지명회의를 지켜봤다. 류현진(한화), 차우찬(삼성) 등이 차례대로 지명됐으나 김현수의 이름은 끝끝내 불리지 않았다. 김현수도, 그의 부모님도 7라운드 지명 전에 자리를 떴다. 청소년대표팀 선수들 중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는 김현수와 당시 드래프트 대상자가 아닌 안산공고 2학년 김광현뿐이었다. 김현수는 “그때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말한다.

드래프트가 끝난 이틀 뒤 김현수는 두산과 신고선수(육성선수) 계약을 했다. 연세대 등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으나 프로행을 택했다. 이복근 팀장은 “지명한 날 곧바로 청소년대표팀이 경기를 하던 문학야구장으로 갔더니 현수 부모님이 관중석에 와 계셨다. 지명을 안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용기를 내서 ‘두산에서 관심이 있는데 아들(현수)을 보내주시겠느냐’고 물었다”며 “당시에 이틀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고 이틀 뒤에 신일고 앞에서 부모님과 현수를 만나 곧바로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탈락한 김현수의 프로행은 그렇게 이뤄졌다.

매일 450개씩 피칭 머신 타격

김현수는 그해 겨울 신고선수로 마무리훈련에 참가해 1.5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이래서 내가 (신인) 지명이 안 된 거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프로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때 그를 조련했던 사람이 김광림 당시 두산 2군 타격코치(현 NC 다이노스 코치)였다. 김 코치는 김현수의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005년 11월 잠실 훈련 첫날 한번에 50번씩 20번을 스윙 하라고 지시했다. 1000번을 스윙 하면서 한번도 요령을 피우지 않고 진지하게 했다. 그때 ‘어, 이놈이 마음속에 맺힌 게 있구나’ 싶었다. 다음날 ‘손목 괜찮냐’고 물으니까 ‘괜찮다’고 해서 다시 1000번 스윙을 시켰다. 그렇게 겨울에 쉬는 날 빼고 20일 정도 내 앞에서 스윙을 1000번씩 했다. 요령이라곤 전혀 없었다.”

김 코치를 비롯해 장원진 코치, 이복근 팀장 등 두산 베어스 관계자들이 기억하는 김현수는 ‘연습벌레’, ‘악바리’다. 장원진 코치는 “아무래도 고교 동기들끼리 라이벌 의식이 있다 보니까 대부분의 신고선수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더 열심히 하려는 게 있다”고 했다. 프로 1년차 2군리그 경기에 나서면서도 그랬다. 김현수는 타석에서 공격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김광림 코치는 “현수는 투수와의 싸움에서는 엄청나게 다혈질이었다. 득점권에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쳤다”며 “자꾸 (경기에) 나가서 돌리다 보면 스스로 선구안이 생길 것 같아서 나 또한 무조건 치라고 주문했다. 한 시즌이 지나니까 선구안이 잡히면서 스윙은 공격형이 되어 있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현수는 안 된다고 포기하는 선수가 아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 악을 쓰고 달려든다. 그래서 더욱 가혹하게 훈련시켰는지도 모르겠지만 현수는 늘 버텨냈다”고 했다. 2006년 데뷔 해에 단 한 타석에만 들어섰던 김현수는 케이비오(KBO)리그 10시즌 동안 통산 타율 0.318, 142홈런 771타점을 기록했다. 통산 타율은 역대 4위에 해당한다.

김현수는 메이저리그 진출 뒤 타격이 안 풀리자 다시 2군리그에서 프로에 적응하던 열아홉살 신고선수 시절로 돌아갔다. ‘초심’을 원했으나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시범경기 초반 23타수 동안 안타가 터지지 않았다. “재앙”(<볼티모어 선>의 댄 코널리 기자)이라고까지 했다. 시범경기 동안 총 8안타밖에 못 쳤다. 이 또한 전부 단타였다. 볼티모어 다른 타자들의 기회를 뺏는다고 생각했던 팬들의 야유가 개막전에서 터진 이유다. “95마일 이상의 빠른 공에 대처가 느리다”거나 “좌투수 공은 못 친다”는 이유로 출장 기회도 제한적이었다. 김현수는 볼티모어가 개막 뒤 치른 43경기에서 단지 11경기에서만 선발로 출전했다.

그러나 김현수는 경기 출장 여부에 개의치 않고 4월 한달 동안 꿋꿋하게 피칭 머신(투구 기계)과 싸우며 묵묵히 기회를 기다렸다. 다양한 구질과 빠른 구속 대처를 위해 피칭 머신에서 40피트, 50피트, 60피트 식으로 치다가 다시 거꾸로 치는 식으로 계속 공을 때렸다. 세션 한번에 150번을 휘두르는 피칭 머신 타격을 매일 3차례(450개)씩 했다. 그의 곁에는 두산 시절 김광림 코치가 그랬듯 전 현대 유니콘스 외국인 타자 스콧 쿨보가 있었다. 쿨보는 <볼티모어 선>과의 인터뷰에서 “김현수는 피칭 머신 공을 엄청나게 쳤다. 공이 눈에 익숙해져서 타격 밸런스를 찾았을 때에는 그 감을 잊지 않으려고 선발에서 제외됐을 때도 계속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타석에서 자신있게 공을 칠 수 있었다. 그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현수라면, 현수이기 때문에”

김현수의 장점은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린 사고로 끊임없이 자가발전을 한다. 장원진 코치는 “현수는 하나의 타격폼을 고집하지 않았다. 남들이 하는 타격폼을 보면서 혼자서 연구를 많이 했다. 자기 스스로 계속 연구해가면서 잘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했던 선수”라고 했다. 김광림 코치의 말도 다르지 않다. “현수는 현재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계속 발전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내고 어느 순간 진화해 있다.” 김현수와 같은 방을 썼던 두산 박건우는 “진짜 남들과는 다른 선배였다”며 “현수 형은 경기 내용이 안 좋으면 방에서 그날의 영상을 찾아보고 혼자 연구하고 그랬다. 그런 현수 형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고 돌아봤다. 김광림 코치는 “하루는 현수에게 ‘정성훈(LG)이 어린 선수였을 때 경기 전 매번 벤치에 앉아서 혼자 스윙을 하고 있더라’는 얘기를 해주면서 ‘그렇게 훈련을 한 선수니까 이만큼 컸다’는 말을 해줬다. 그날 이후부터 정성훈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면 바로 실행에 옮겼고 작심삼일이 아니라 꾸준히 하면서 습관을 만들었다”고 했다.

김현수의 과거 시련은 비단 ‘신인 드래프트 탈락’에 그치지는 않는다. ‘4못쓰’(4할도 못 치는 쓰레기)로 불리기도 하는 ‘타격기계’ 김현수는 한때 포스트시즌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2008 한국시리즈(SK전) 때는 타율 0.048(21타수 1안타)에 그쳤고 2013 준플레이오프(넥센전) 때는 타율 0.067(15타수 1안타)을 기록했다. 결정적인 득점 기회 때마다 병살타를 때려내 스스로도 “1루에 주자만 있으면 온몸에 심장이 다 달려 있는 것처럼 떨리고 긴장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성적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2015 한국시리즈(타율 0.421)를 통해 김현수는 기어이 ‘가을야구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치열한 연구와 훈련의 결과물이었다.

김현수에게 두산행을 권유한 이복근 스카우트 팀장이나 2군에서 그를 조련한 김광림 타격코치, 그리고 대부분의 두산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현수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안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광림 코치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떨어지던 날, 현수가 어머니가 우시는 걸 보고 마음을 다잡은 것 같다. 어머니의 눈물로 마음속에 각오를 새겼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봤기 때문에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지금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현수는 한때 ‘잡초’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땅에 단단한 뿌리를 내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메이저리거가 됐다. 내년 시즌 풀 타임 주전으로 뛰기 위해서는 좌투수 공략(올 시즌 좌투수 상대 18타수 무안타 4볼넷 4삼진)이 필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현수라면, 현수이기 때문에 잘 이겨낼 거라고.”

한겨레

▶ 김양희 맨 처음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보면 꼭 그날의 야구 스코어가 적혀 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맨 먼저 가고팠던 곳이 잠실야구장이었다. 혼자서 잠실야구장 구석에 앉아 캔맥주 들이켜면서 경기를 보곤 했다. 지금은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장을 찾고는 한다. 어쩌다 아들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동화도 썼다. ‘김창금의 축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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