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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위장취업까지 해봤지만… 한달간 공친 란파라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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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금지법 한달] [상] 書面 신고 12건중 란파라치 실적 0건

- 대박 꿈꿨는데…

학원 강의 듣고 카메라까지 구입, 제보받고 현장 덮치려 잠복도

일식당 종업원으로 몰래 취업… 더치페이 하는 바람에 허탕

강남 유흥주점 제보 막기 위해 여종업원 휴대폰 사용 전면금지

지난 25일 밤 룸살롱(유흥주점)과 고급 술집들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골목.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의 합성어·부정청탁금지법 위반자를 쫓는 공익 제보자) 최상(가명·38)씨는 한 유흥주점 앞에 중형차를 세워두고 몇 시간째 잠복 중이었다. 그는 한 달 가까이 서울의 한 구청 공무원 A씨의 뒤를 밟고 있었다. "A씨가 고급 술집에서 수시로 접대받는다"는 제보를 접수하고 접대 현장을 덮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최씨는 이날까지 5~6차례 잠복했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예약을 했다는 첩보를 들을 때마다 술집 앞을 지켰지만 A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술집 종업원은 "A씨가 예전과 달리 예약 없이 불쑥 오는 식으로 행동 패턴을 바꿨다"고 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술집이라 보안이 엄격해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신고 포상금을 받으려면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을 위반한 사람들의 이름과 직함, 근무 부서, 접대 및 수수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알고 신고해야 한다. 최씨는 "A씨가 내가 뒤를 밟는 걸 알았는지 잠복하지 않을 때만 찾아오는 것 같다"며 "한 달간 허탕쳤는데 증거를 잡는 게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란파라치’ 최상(가명·38)씨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 앞에 자신의 승용차를 대고,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을 위반하는 듯한 사람을 차 안에서 캠코더로 몰래 찍고 있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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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청탁금지법이 28일로 시행 한 달째를 맞았다. 이 법 시행 이후 비싼 식사 대접이 줄고 '더치페이(각자 계산)' 문화가 확산되는가 하면 부정 청탁이나 민원이 줄었다며 반기는 곳도 많다. 하지만 란파라치들이 겪은 지난 한 달은 달랐다. 청탁금지법에서 정한 최대 2억원의 포상금을 노리고 란파라치 세계에 뛰어든 이들 중에 건수를 올린 사람은 1명도 없었다. 본지가 만난 10명의 란파라치는 "금품 수수나 부정 청탁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적발하기 어렵다"며 "법 때문에 수법이 이전보다 더 교묘해지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대표적인 수법이 고급 식당이나 술집에서 접대를 할 경우, 약속 장소와 시간을 수시로 바꾸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몇몇 유흥주점은 여종업원들이 사진을 찍어서 제보하는 걸 막기 위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4년간 카파라치(도로교통법 위반을 적발하는 공익제보자) 활동을 하다가 란파라치가 된 김모(29)씨는 "카파라치를 할 때는 길목만 잘 확보하면 하루에 몇 건씩 적발해 한 달에 300만원가량은 벌 수 있었는데, 지난 한 달은 식당과 술집 쓰레기통을 뒤져도 잡은 게 없다"고 했다. 그는 란파라치로 활동하려고 학원 수강도 하고 수십만원짜리 카메라 장비도 새로 구입했지만 한 달간 한 푼도 벌지 못했다. 8년 넘게 '세(稅)파라치'(탈세범을 쫓는 공익제보자)를 하다가 란파라치에 뛰어든 송모(55)씨도 "10월 중순에 서울의 한 대학교 교수가 출판사의 접대를 받는다는 제보를 받고 해당 식당 앞에서 며칠간 잠복을 했는데, 약속 날짜를 4번이나 바꿔서 허탕을 쳤다"고 했다. 송씨는 "란파라치를 그만두고 다시 세파라치나 해야겠다"고 했다.

일부 란파라치는 확실한 증거를 잡으려고 위장 취업까지 한다. 다른 란파라치 2명과 팀으로 움직이는 주부 김모(46)씨는 지난 15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서울의 한 구청 간부가 건설회사 직원과 이 식당에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한 지 사흘째 저녁에 구청 간부가 식사를 하러 왔길래 소매에 숨겨둔 담뱃갑 크기 몰래카메라로 사진까지 찍었지만 이들이 더치페이를 하는 바람에 허탕쳤다"고 했다. 5년 넘게 식(食)파라치(식품위생법 위반 사례를 쫓는 파파라치)로 활동해온 김모(59)씨는 "란파라치가 되면 월 300만원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다는 란파라치 학원의 홍보는 새빨간 거짓"이라면서 "확실한 제보를 받고 움직이는 베테랑들도 수십 번씩 허탕을 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경찰청이 지난 한 달간 김영란법 위반으로 서면 신고를 접수한 12건 가운데 란파라치가 신고한 것은 한 건도 없었다. 그나마도 신고 대부분이 금품을 받은 공직자가 자진 신고한 것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112 전화 신고는 총 289건이 접수됐지만, 모두 신고 요건을 갖추지 못해 경찰이 출동한 경우는 없었다. 국민권익위원회에도 한 달간 부정 청탁(17건), 금품 수수(25건), 외부 강의(2건) 등 총 44건이 신고됐지만, 란파라치 신고는 없었다.

[권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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