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4)무능한 정치·비겁한 판결…법 위에 군림하는 ‘피고 대한민국’

댓글 18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법정 위에 선 ‘법치국가’

경향신문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 비친 태극기(왼쪽 사진). 오른쪽은 같은 날 대법원 앞. ‘2015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1심 형사합의부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한 비율은 66.8%로 2005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가를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 법을 어겼다면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이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국가란 뜻이다. 법은 왜 만들었을까. 민주공화국을 위해서다. 질문이 돌고 도는 것 같지만 그게 핵심이다. 실은 다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다 같이 행복해지려고 ‘민주공화국’을 선택했고 법을 만들었다. 법은 국가가 ‘국민 행복’을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법을 지키지 않은 국가는 피고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피고 대한민국’에게 묻는다.

■책임지지 않는 나라

지난 9월 한국수자원공사와 농어촌공사의 내부자료가 공개됐다. 이 자료에는 4대강 수질개선에 8000억원, 농업용수공급에 2조원을 투입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내세운 명분은 수질개선이었다. 최소 22조원을 삼킨 4대강은 괴생물체를 토해내는 폐강이 되어가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은 9월12일 “금강과 낙동강에 이어 한강 상류에서도 ‘4급수’에서 서식하는 실지렁이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한강도 더러운 물이 됐다는 징표다. 금강에선 시궁창 깔따구가 나왔다. 낙동강에서 발견된 죽은 물고기 배 속에 기생충이 득실거렸다. 4대강사업 이듬해부터 강물에서 ‘녹조라떼’를 퍼올린 인증샷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궜다. 올해 4대강 16개 보 운영비는 311억원, 유지보수비용은 151억원이 편성됐다. 4대강사업을 떠맡은 한국수자원공사는 지난해 5조6000억원, 올해 1615억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실패한 사업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비용을 쏟아부어야 할지 추산하기도 힘들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4대강사업에서 법치의 실종도 목격한다. 나쁜 정책이 무능한 정치와 비겁한 판결을 만나면 어떤 귀결이 나는지를 4대강사업은 잘 보여준다. 이 사업은 크게 4단계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1단계, 정부는 정책을 강행한다. 2단계, 다수당이던 여당은 찬성, 야당은 막지 못한다. 3단계, 반대하는 국민은 소송을 제기하지만 법원은 판결을 미루거나 정부 손을 든다. 4단계,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는 반대여론이 높은 정책과 국가가 피고인 거의 모든 소송에서 반복된다.

정부 정책 추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민주공화국’다운 방법은 야당이 국회 안에서 설득과 토론으로 정책추진을 무산시키는 것이다. 야당은 그러지 못했다. 두번째는 국민투표로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명시한다. 반대여론이 높을 때 대통령이 자신이 추진하고 싶은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민들은 소송을 했다. 정부가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가재정법상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비타당성조사를 하지 않았다. 환경영향평가는 부실하게 진행했다. 2009년 11월10일 영산강에서 4대강 공사가 시작되자 보름 뒤 국민소송인단이 소송을 제기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관할 4개 법원에 ‘하천공사시행계획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피고는 한국수자원공사 등 대한민국. 8945명이 원고로 참여했다.

본안 판단이 나올 때까지 공사를 중지해달라는 가처분 소송도 냈다. 법원은 기각했다. 공사는 소송과 별개로 속도를 내며 진행됐다. 첫 판결은 서울행정법원에서 나왔다. 소송이 시작된 지 1년 후다. 피고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재판부는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일부 부실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은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당시 소송인단을 변론한 김남주 변호사는 “평가가 제대로 됐는지 봐달라고 소송을 냈는데 재판부는 ‘평가서가 있으니 됐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 논리는 다른 3개 법원 1심 판결에서도 거의 인용됐다.

4대강사업의 법적 문제점을 유일하게 인정한 곳은 2심인 부산고법이다. 재판부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은 것은 국가재정법 위반”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규모 국책사업인 이 사업은 대부분의 공정이 90% 이상 완료돼 이를 원상회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며 “뒤늦게 이를 취소한다면 기존에 형성된 법률관계에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공사가 이미 너무 많이 진행돼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공사가 90%나 진행될 때까지 판결을 내리지 않은 것도, 판결이 다 나올 때까지 공사를 일단 멈춰달라고 낸 가처분 소송을 기각한 것도 법원이다. 논리적으로 해괴하게 보이는 이 판결은 ‘사정판결(事情判決)’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사정판결은 원고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사정을 이유로 들어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말한다. 이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후에 대법관이 됐다.

대법원이 최종판결을 내린 것은 공사가 끝난 지 2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사건번호 ‘2009구합50909(서울행정법원)’는 6년이 지난 2015년 12월10일에서야 마무리됐다. 피고 대한민국의 승리다. 단 한 줄의 소수의견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내부사정을 잘 아는 한 법조인은 “한 대법관이 이 정도로 중요한 국책사업에 대한 판단은 전원합의체에 넘겨 소수의견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그 대법관이 퇴임할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소부(소재판부)에서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대법원은 4대강사업의 정당성 논란에 가장 진한 마침표를 찍은 행위자가 됐다.

대법원이 사건을 뭉개던 2013년 1월 감사원이 “4대강사업은 총체적 부실”이라고 발표했다. 사업 효과와 경제성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고 사업 이후 수질은 더욱 나빠졌다고 했다. 국민들은 형사소송에 기댔다. 이명박 대통령과 4대강사업을 추진한 공무원 57명을 배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2년 동안 쥐고 있다가 지난해 11월에서야 무혐의 처리했다.

시민들은 나쁜 정책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막지 못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야당 위원들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4대강사업의 책임을 묻겠다고 했지만, 최순실 등 ‘비선 실세’의 경악스러운 행위가 국감 이슈를 집어삼켰다. 환경단체들은 4대강 청문회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www.4river.or.kr)을 벌이고 있다.

■사법정치시대

정부와 사법부가 손발을 맞춘 ‘사법정치’는 지금도 목격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 4대강사업이 있다면, 박근혜 정부에선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있다. 두 정책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의 극렬한 반대에도 정부는 지난해 11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교육부 장관 명의로 발표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지난 14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교육부가 2014년 1월 역사교육지원팀을 구성해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마다 청와대비서관들과 회의했다”며 내부문건을 공개했다. 집권 2년차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정부는 강행했고 야당은 막지 못했다. 시민들은 다시 법에 기댔다.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도 헌법재판소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법은 소 접수 후 180일 안에 사건을 선고하도록 돼 있지만, 헌재는 245일이 지나서야 교육부로부터 답변서를 받았을 뿐이다. 교육부는 다음달 국정역사교과서 최종본을 공개하고 내년 3월부터 현장에 적용한다. 교육부는 2016년에만 역사교과서 개발·홍보 비용으로 44억원의 예비비를 책정했다. 시민과 학계가 반대하는 사업을 추진하다보니 홍보비로만 25억원을 지출했다.

정부정책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사법부는 국민에겐 위험한 무기이자 대통령에겐 더없이 잘 드는 칼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은정 교수는 저서 <왜 법의 지배인가>에서 “우리나라 법공직자들은 어느 나라의 법관이나 검사들보다도 재량의 범위가 넓다”고 썼다. 박 교수는 “오늘날 사법개입의 확대는 사회생활의 전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진단했다.

대법원은 2013년 12월 통상임금 범위를 결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을 도입했다. 이 판결은 통상임금을 넓게 보아 노동자들의 권리를 넓혀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고려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 사실상 사측 재량권을 넓혔다. 대법원 판결 전 박근혜 대통령은 임금문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GM 회장에게 “해법을 찾겠다”고 했다. 한 중견 법조인은 “사법부가 판결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비판이 법조계 내부에서 돈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사법부는 논리와 시간을 무기로 뒷받침하면서 행정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한 부장판사는 “정치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자꾸 법원으로 넘어오는데, 법원에선 정책 타당성이나 결과를 평가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오직 법적 절차를 지켰느냐만 판단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2010년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통과됐을 때 헌재는 “투표절차에 문제가 있었지만 결과를 무효로 할 만큼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 ‘결과를 무효로 할 만큼’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무력화된 삼권분립

경제평론가 이원재씨는 ‘민주공화국의 위기’를 보여준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단독사면을 꼽는다. 2009년 12월 사면심사위는 평창올림픽유치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수천억원대 경제범죄를 저지른 이 회장에 대한 ‘원포인트’ 사면을 단행했다. 이씨는 “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너무나 명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원포인트 사면’은 사법정치 문제와 함께 삼권분립의 실종을 드러낸다.

경향신문

지난 21일 경찰은 ‘백남기 농민 추모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패를 세워 이동로를 차단했다. ‘공권력’이라 부르는 국가의 행위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의미와 곧잘 부딪친다. 정지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는 한국의 삼권분립이 상당히 취약하다고 진단한다. 박 교수는 “말만 삼권분립이지 정부의 힘이 제일 막강하고, 대통령이 정당을 통해 국회까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민주공화국의 핵심 운영원리는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 삼권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서로 견제하는 것에 있다. 대한민국의 삼권은 분립된 것일까, 통일되어가는 것일까. 한국은 세계에서 드물게 정부도 입법권을 갖고 있다. 대법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해 입법로비 활동을 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국회에는 판검사가 ‘대관업무’를 위해 공식적으로 상주한다. 대법관에 재직 중이거나 대법관이 안된 고위 법관들은 국무총리, 감사원장 등 정무직으로 쉽게 자리를 옮긴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49명(16.3%)이 법조인 출신이다. 법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법 제정자가 되고, 정부 일원이 된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강대 법대 임지봉 교수는 인사권에 주목한다. 임 교수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대법원장이 대법관 13명, 헌법재판관 3명에 대한 제청권을 갖고 있다. 대법원장만 대통령의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으로 앉혀놓으면 전체 사법부가 따라오게 돼 있다. 이런 구조가 사법부의 관료화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사법부의 ‘나라 걱정’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국가의 위법행위에 배상을 구하는 국가배상사건 추이를 보면 2015년 국민이 승소한 비율은 34.7%에 불과하다. 국민이 패소한 비율은 2010년 36.6%에서 2015년 62.2%로 올랐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피고 대한민국’을 법정에 세워도 사법부가 스스로 국가의 일부라는 속성을 버리지 않으면 국가와의 싸움이라는 심판을 또 다른 이름의 국가에 맡기는 셈이다.

■‘원고 대한민국’이 하는 일

추석을 앞둔 지난 9월7일 경기도 평택의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김수경씨(54)를 만났다. 그는 2009년 쌍용자동차가 발표한 정리해고자 2646명 중 한 명이다. 1989년 입사한 김씨는 근속 20년 되던 해, 해고통보를 받았다. 1억4000만원을 대출받아 아들과 함께 살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지 한 달 만에 들은 소식이었다. 매달 81만6000원의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그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 후 7년, 김씨는 보험회사와 상조회사 영업사원, 공사장 일용직, 버섯농장 일 등 투잡, 스리잡을 거치며 버텼다. 빚은 더 늘었지만, 지난해 11월 노사가 복직안에 합의하면서 살길이 열린다고 믿었다. 노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복직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고, 지난 2월 18명이 회사로 돌아갔다.

대량 정리해고, 77일간의 옥쇄파업과 경찰의 대규모 진압작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사한 해직자 28명…. 쌍용차의 상처는 6년 만에 타결된 복직협상으로 치유되고 있을까. 복직합의 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추가로 복직된 사람은 없다. 148명이 기약 없이 다음 복직을 기다린다. 김씨는 “다들 복직되리라 믿지만 점점 불안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사합의서엔 “복직시킨다”가 아니라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고 돼 있다.

무급휴직 후 복직한 ㄱ씨는 “회사에서 두 달 교육 받았는데 어떤 간부들도 ‘고생했다’는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며 “남아 있던 사람들이 회사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더 열심히 하라”는 말만 했다고 전했다. ㄱ씨는 “회사가 우리 앞에서 ‘산 자들’ 얘기만 하는 것을 보니 속에서 울분이 터졌다”고 말했다. ㄱ씨가 말하는 ‘산 자’란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쌍용차 사람들은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김수경씨가 말했다. “직원들이 거의 같은 아파트에 모여 살았는데 한 엘리베이터에서 윗집 아이가 아랫집 아이한테 ‘너희 아빠 죽었다며(너희 아빠 해고됐다며)?’라고 말한 거예요.” ㄱ씨가 실제 죽은 28명을 떠올리며 이어 말했다. “28명이나 죽은 건 돈 때문이 아니에요.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받아서…. 마을이 그렇게 초토화가 된 거죠. ”

국가는 무엇을 했을까. 국가는 소송을 걸었다. 경찰은 노조의 저항으로 헬기와 기중기가 파손된 것을 두고 노조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복직합의를 선언하면서 노사는 상대에게 제기했던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했지만, 경찰은 소송을 계속하고 있다. ‘원고 대한민국’은 1·2심에서 이겼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해직자들은 경찰에 15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 지연 이자는 하루하루 61만8000원씩 쌓여간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복직될 날만을 기다리는데.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을 경찰이 내놓으라고 하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민간기업의 노사 문제에는 우선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원칙이다. 그러나 ‘재산권 보호’ ‘시민 안전’ 등을 이유로 국가는 곧잘 노조 시위 현장에 개입한다. 노조 시위를 툭하면 불법파업으로 매도한다. 파업이 장기화되거나 다른 노조와 연대하면 ‘외부세력 개입’ 또는 ‘종북 세력 난입’으로 낙인찍는다. 노사 합의 뒤에도 파업에 따른 배상을 청구한다. 2009년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시위 후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했지만, 경찰은 이후 시위 참가자와 주최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것이 ‘원고 대한민국’이 잊지 않고 하는 일이다.

원고 대한민국의 또 다른 얼굴은 검찰이다. 검찰은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고 대척점에 서는 당사자다. 검찰은 2014년 탈북 화교 출신인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혐의로 기소했다. 항소심 도중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증거가 조작된 문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공소를 취하하지 않고 상고했다. 이 사건은 결국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의 끈질긴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간첩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검찰은 유씨를 불법대북송금을 도왔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2010년 같은 사실을 두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소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4년 만에 유씨를 기소했다. 누가 보아도 ‘보복기소’였다.

지난 9월 항소심(서울고법)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며 검찰이 공소권을 남용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현재 사건을 기소한 것은 통상적이거나 적정한 소추재량권 행사라고 보기 어려운바, 어떠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므로 공소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평가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어떻게 했을까. 상고했다. 느닷없이 간첩으로 몰려 구금됐고, 어렵게 조작된 증거라는 사실이 밝혀져 겨우 간첩혐의를 벗은 유우성씨는 여전히 검찰이 친 거미줄에 얽혀 고통받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군의날 기념식 때 “북한 주민들은 자유로운 남한으로 오라”고 했다. 유우성씨 사건을 기록한 영화 <자백>을 본 또 다른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홍강철씨는 “지금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선 간첩만들기가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피해자들은 권리구제도 스스로 해야 한다. 헌법 28조는 “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서 구금되었던 자가 법률이 정하는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무죄판결을 받은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에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무죄판결을 받은 지 6개월 이내에 형사보상금을 청구하지 않으면 어떤 보상금도 받을 수 없다. 2015년에만 509억원의 형사보상금이 지급됐다. 검찰이 기소를 잘못해 발생한 최소한의 재판비용이다. 모두 세금이다. 원고 대한민국은 이런 일을 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의심케 했던 사건의 주인공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더불어민주당 백재현 의원은 “4대강사업과 관련해 1152명이 훈·포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역대 토목공사 관련 최대 규모다. 4대강사업의 진짜 목적으로 의심했던 대형건설사들의 담합비리는 사실로 드러났다. 관련자들은 뒤늦게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건설사들이 이미 이익을 챙긴 뒤다. 이익과 벌 중 어느 것이 더 남는 장사일까?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과정에서 외압 사실을 밝히고 국정원의 범죄행위를 찾아내 기소한 수사팀 검사들은 좌천되거나 검찰을 떠났다. 반면 국정원간첩조작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은 경징계만 받고 여전히 검사로 근무한다. 검사들이 증거를 조작했다면 ‘범죄자’이고, 조작된 증거라는 것을 모르고 재판부에 제출했다면 ‘무능한 바보’일 것이다. 검사들은 최소한 후자로 보인다. 대선개입사건과 간첩조작사건의 중심인 국정원은 개혁안을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세월호 참사가 터지며 대선개입사건이 여론 관심에서 사라진 뒤 아직까지 아무런 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2009년 용산참사 당시 경찰이 상황파악을 잘못해 과잉진압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수사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버틴 검경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현장에 특공대를 투입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은 20대 국회의원이 됐다. 쌍용차 파업 당시 진압을 지휘한 김정훈 경기청 정보과장은 신임 서울경찰청장이다. 삼성이 검찰 고위관료들에게 뇌물을 상납한 사실을 담은 ‘삼성 X-파일’을 공개·폭로한 노회찬 전 의원은 2013년 불법녹음 파일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정치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녹음파일에 등장한 당사자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더욱 책임 있는 자리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으로서 KBS 보도에 적극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이정현 의원은 여당 대표가 됐다. 총선에서 ‘VIP의 심기’를 운운하며 공천에 개입한 여당 의원들도 의정활동을 계속한다. 검찰은 이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법도 정의도 무시당하는 시대, 1%들의 생존전략은 ‘버티는 놈이 이긴다’이다.

냉전시대 소련 스파이를 변호하게 된 미국 변호사의 실화를 다룬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 제임스 도노반 변호사(톰 행크스 역)는 피고인의 정보를 건네라는 정보기관 직원의 협박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독일계고 나는 아일랜드계인데 우리가 어떻게 같은 미국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규정 때문이야. 우리가 같은 헌법을 지키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같은 미국인으로 살 수 있는 거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패닉’의 한가운데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2016년 시민들은 ‘원고 대한민국’, ‘피고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지키며 사는 걸까.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