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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책 속에 푸욱~ 파묻힌 가을밤 Book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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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들이 스스로 찾아가는 공간이자 새로운 쉼의 방식인 '북스테이'

경남 통영·충북 괴산을 가다

TV 대신 책 끌어안고, 진짜 '쉼'을 누리다

읽어야 할 것들을 읽느라 하루를 다 보낸다.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읽고, 페이스북을 열어 친구의 푸념을 읽고, 이메일 속 어지러운 글자와 숫자들을 읽어내려간다. TV를 틀어도 자막의 홍수. '읽기 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조선일보

경남 통영의 작은 서점 ‘봄날의 책방’은 게스트하우스 ‘봄날의 집’과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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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휴식이란 꼭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읽는 행위. 읽지 않아도 아무 지장 없을 무언가를 읽으며 해방감을 맛보는 짧고 깊은 시간. 몇날 며칠 한곳에 머물며 이 책 저 책 맘껏 들여다볼 수 있는 '북스테이'(book+stay)는 읽어야만 하는 것들에 파묻힌 도시인들이 스스로 찾아가는 공간이자 새로운 쉼의 방식이다.

여행자의 책방

경남 통영 '봄날의 집'으로 내려가는 길. 커피믹스 3개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달콤한 독서에 실컷 시간을 낭비하며 기필코 밤을 새우리라.

봉수골이라 불리는 한적한 주택가에 봄날의 집은 있다. 생선찜과 막걸리를 파는 소박한 식당들과 전혁림미술관, 한빛문학관이 이웃하는 동네다. 봄날의 집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 정은영 대표와 남편인 건축가 강용상씨가 40년 된 폐가를 개조해 2년 전 문 연 게스트하우스. 지금껏 1500명 넘는 손님이 다녀갔지만 커피잔 하나 깨진 적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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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봄날의 집’ 공용 거실에는 넓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같은 날 묵는 여행자들끼리 밤새워 독서 토론과 수다를 벌이기도 하고, 각자 조용히 책에 빠져들기도 한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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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열고 들어서면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옻칠로 통영의 푸른 바다를 그린 작품과 전통 나전칠기, 누비이불이 곳곳을 장식한 갤러리 같은 공간이다. 구석구석 공들인 손길이 느껴지니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작은 서점 '봄날의 책방'이 이 집의 안방. 이곳에 묵는 손님은 책방에서 책을 사거나, 집 안에 꽂혀 있는 책을 잠시 빌리거나, 직접 가져온 책을 꺼내 읽으면 된다.

책방지기 이병진씨가 귀띔한다. "일과 휴식의 균형을 다룬 책이 단연 많이 팔려요. '제주에서 뭐하고 살지?'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제목만 봐도 지친 도시인에게 와닿는 책들이죠." 두꺼운 과학책이나 역사책, 커다란 그림책도 책방 여기저기 꽂혀 있다. "의외로 사가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여기까지 와서."

휴식이란 이런 것

충동구매를 하기로 한다. ‘야구란 무엇인가’ ‘세상 물정의 물리학’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산책’. 서울 대형 서점에서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법한, 업무와는 거의 관련 없는 책들이다. 한 아름 책을 안고 숙소로 돌아오니 커다란 탁자 위에 방명록 여러 권이 펼쳐져 있었다.

‘2016년 4월 9일. 봄날의 집에 들어온 지 30분. TV가 없으니 눈이 편하고, 공간이 좁으니 다리가 편하고, 조용하니 귀가 편하고…. 아! 휴식이란 이런 것. 통영의 골목길에서 내일도 놀아야지. 요한.’

‘2015년 8월 20일. 정말 멋져요. 마치 전시장, 박물관에서 자는 것 같아요. 제 꿈은 판타지 소설 작가예요! 초등학생 김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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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봄날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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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영어와 일본어, 정성 들여 쓴 어른의 글씨와 꾹꾹 눌러 쓴 아이의 글씨가 한데 섞여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TV가 없다.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지식 노동자들이 주로 찾아오고, 엄마가 아이를 데려오기도 하고, 한 번 왔던 사람이 또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요한 선택을 앞뒀을 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때 자신만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다.

숙소 안 4개의 방 중 ‘작가의 방’이 오늘 긴 밤을 보낼 곳. 정갈한 침대와 책상, 전등, 책꽂이. 벽에는 소설가 박경리의 작품 속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밤이 시작되자 도시에선 경험해보기 힘든 적막이 방안으로 짙게 깔렸다. 그 어떤 소리도 허락되지 않는 정적과 고요.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봄날의 집

경남 통영시 봉수1길 6-1. 고속버스로 서울~통영 4시간. 통영터미널에서 봄날의 집까지 택시로 15분.

1층 ‘작가의 방’은 소설가 박경리를 테마로 꾸민 1인실(7만원). ‘화가의 방’은 전영근 화백의 작품을 전시한 2인실(12만원). 2층 ‘장인의 다락방 1’(2인실·11만원)은 나전칠기, ‘장인의 다락방 2’(1~2인실·8~10만원)는 전통 가구를 테마로 꾸몄다. 거실, 주방, 화장실은 공동 사용. 인근 식당에서 조식 제공.

10세 이하 어린이는 숙박할 수 없음. 일·월요일 휴무. 예약은 이메일(guest@namhaebomnal.com)로만 받는다.
http://www.namhaebomnal.com/arthouse 참조.

[괴산·통영=최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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