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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훅INSIDE]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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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C=이정아 기자] 2002년 11월, 미국 추수감사절 날 백악관 앞뜰.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칠면조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칠면조가 약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녀석이 아마도 자기가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기자회견은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건 불편한 자리입니다. 자신의 국정 철학과 정책 소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기자와 국민 앞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야 하는 자리도 되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대통령 연설문이 사전에 최순실 씨에게 전달됐다’는 의혹과 관련해 사실을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준비된 사과문 원고를 읽어내려가는데 걸린 시간은 1분 30초. 이마저도 생방송이 아닌 ‘사전 녹화’ 방식으로 사과 발표를 진행됐습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취재진의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했습니다. 질의도, 응답도 없는 일방적인 ‘사과 통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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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에 대한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다만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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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뒤엔, 질의응답이 있었는데….



밀양이냐, 가덕도냐, 신공항 입지를 둘러싼 갈등이 극에 달했던 2011년. 이명박 정부는 두 곳 모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신공항 사업 자체를 백지화했습니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를 내걸었지만 과열된 유치 경쟁이 결정적 영향을 줬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권과 영남권 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들의 반발이 더 거세졌습니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신공항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이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요. 재임 내내 소통을 강조했지만 기자회견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 전 대통령도 당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만큼 중차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겠죠. (이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이 없는 라디오나 인터넷 연설을 통해 현안에 대한 입장을 전달했던 편이었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신공항 백지화에 따른 대통령 탈당 필요성’ ‘내각 개편’ ‘지역발전 계획’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불편한 자리였겠지만 이 전 대통령은 질문 하나하나 답변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해야만 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국정을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이니까요. 이 전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모습은 전파를 타고 생방송으로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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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발표 도중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모습. [사진=헤럴드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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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경찰의 과잉진압에 따른 전용철·홍덕표 농민의 사망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한 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책임자를 가려내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들에게 대해서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국가가 배상을 하도록 하겠다”는 방안도 밝혔습니다.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송곳 같은 질문들이 퍼부어졌습니다. 당시 경찰을 진두지휘했던 허준영 전 경찰청장 문책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묻는 기자들의 질의가 그것이었는데요.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청장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허 청장)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같은 노 전 대통령의 답변 뒤 “농민단체와 유가족 등이 요구한 사퇴는 하지 않겠다”며 뜻을 분명히 했던 허 청장은 사표를 냈습니다. 사표는 당일 수리됐습니다. 두 농민 모두 경찰의 과잉진압이 인정돼 손해배상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답변이 가지는 무게가 이렇게나 무거운 겁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없는 나라?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발표 형식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이번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처럼 사전 녹화로 진행하든,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든(굉장히 이례적인 형식인 건 사실입니다만), 핵심은 최고 국정 운영자의 사과에 국민들이 ‘진정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여야 하겠지요. 일종의 위기관리 메시지 전략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국민 사과에서는 해명도 없었습니다.

청와대 문건이 공식적인 직책을 갖고 있지 않은 최 씨에게 전달된 구체적인 경위도, 최 씨가 대통령 연설문이 아닌 청와대 인사안까지 사전 검토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최 씨가 2014년 3월께부터 (박 대통령에게 개인적인 소감을 전달하는) 일을 그만두게 한 경위는 무엇이었는지도, 최 씨가 최고 국정 행위에 깊숙이 개입한 기가 막힌 의혹에 대한 대응 방안도.

온 국민이 대통령에게 묻는데도 대통령은 최 씨와의 ‘인연’을 전하며 브리핑실을 떠났습니다. 이렇다 보니 ‘최순실 게이트’가 아닌 ‘최순실 섭정 사태’라고 규정되는 이 판국에도 기자들이 박 대통령의 생각을 물어볼 길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과와 후속 개혁조치를 담은 대국민담화를 발표했을 때도 별도의 질의 응답은 받지 않았습니다.

백악관의 최장기·최고령 출입기자였다가 은퇴한 헬렌 토머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추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다.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 대통령의 어정쩡한 사과를 보면서 국민들은 ‘대통령이 과연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는 있을까?’하고 되묻고 있는데요. 박 대통령이 모든 것을 꼼꼼히 다 챙겨야 하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리더십을 갖추고 있다 보니 여유가 없어 짧은 사과만 남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국민들에게 절실한 것은 박 대통령을 향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통령의 ‘구체적인 답변’입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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