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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취재파일] 가짜 복서에서 국적 사기까지 치욕의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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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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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7일 전북 정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IBF(국제복싱연맹)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인 우리나라의 권순천 선수는 동급 8위인 콜롬비아의 알베르토 카스트로를 12회 KO로 꺾고 3차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경기는 매우 이상했습니다. 도전자인 카스트로의 기량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무지 이길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 도전자는 ‘가짜 복서’로 판명이 났습니다. 챔피언 권순천과 타이틀전을 벌인 선수는 카스트로가 아니라 카라바요 플로레스라는 무명의 복서였습니다. 외국 프로모터와 플로레스의 매니저인 알만도 토레스가 허위 문서를 작성해 농간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이 타이틀전 주최에 간여했던 ‘한국 프로복싱의 대부’ 전호연 씨는 “나도 토레스에게 속은 선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구속 수감돼 10개월의 실형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양정규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총사퇴했고 권순천 선수는 대전료 2천8백만원도 받지 못한 채 타이틀전은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잠잠하던 ‘가짜 복서’는 22년 뒤에 또 등장했습니다. 2006년 10월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세계 여자 프로복싱 챔피언스리그 대회에 참가해 밴텀급 이화원(당시 25세) 선수와 대결했던 중국의 양야훼이(17세)가 사실은 쉔예단(19세)이라는 전혀 다른 선수였던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가짜 복서' 사건이 불거지자, 미리 여권 등 관련 서류를 통해 양야훼이 대신 쉔예단이 참가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않았던 KBC 간부들이 책임을 지고 뒤늦게 줄줄이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이로부터 3년 뒤인 2009년에는 프로복싱 기대주 김정범(당시 30세)이 동양타이틀 6차방어전을 치를 때 상대했던 선수가 '가짜 복서'인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김정범은 당시 6차 방어전에서 닉네임이 싱토통 플라잇짐(24세.본명 Samart Ngamsanga)이란 태국 복서와 맞붙었는데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끝에 1라운드 시작 2분30초 만에 TKO로 가볍게 제압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이후에 도전자의 실제 이름이 차이야폰 찬키아오(Chaiyaporn Chankhiao)였다는 것이 드러나 타이틀매치가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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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프로농구에서는 출생증명서를 위조해 혈통을 속인 또 다른 의미의 ‘가짜 선수’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시즌 신인상을 받은 부천 KEB하나은행의 첼시 리는 '해외동포 선수' 자격으로 국내 무대에서 활약한 데 이어 지난 8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특별 귀화까지 추진했다가 뒤늦게 한국 핏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졌습니다.

첼시 리는 할머니가 한국 사람인 것으로 인정받아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규정에 따라 '해외동포 선수' 자격으로 한국 무대 입성에 성공한 뒤 한 시즌을 소화했습니다. 하나은행은 외국인 선수와 비슷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외국인 선수 쿼터’ 적용을 받지 않은 첼시 리의 활약을 앞세워 리그 준우승까지 차지했습니다. 문서 위조 범죄를 저지른 부정 선수가 시즌 내내 코트를 누빈 셈이 됐고, 이 사실을 몰랐던 대한농구협회는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첼시 리를 농구 우수인재 특별귀화 추천 대상자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첼시 리의 ‘혈통 사기’에 이어 최근 프로축구에서는 ‘국적 사기’가 발각됐습니다. 프로축구 강원 FC의 세르징요가 위조여권 사용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르징요는 원래 국적은 브라질이지만 조부가 시리아계라며 2013년 시리아 국적을 취득했는데,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위조한 것으로 경찰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권을 위조해 국적 사기를 벌이는 이유는 K리그 등 아시아지역의 프로축구 리그에서 그만큼 뛸 기회가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K리그 각 구단은 최대 4명(3+1)의 외국인 선수를 둘 수 있는데 비아시아지역 출신 3명에 아시아지역 출신자는 1명 더 뛸 수 있습니다. 아시아지역 국적이 있으면 그만큼 K리그에 들어올 확률이 높은 셈입니다. 이른바 ‘아시아 쿼터는 K리그뿐만 아니라, 일본 J리그, 중국 슈퍼리그 등 아시아지역 대부분의 프로축구에서 도입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가짜 복서’에 최근의 ‘국적 사기’ 까지, 한국 프로스포츠는 지난 30년 동안 한마디로 ‘가짜 선수’로 얼룩졌습니다. 이들의 사기 행각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우리의 검증시스템이 허술했고 때론 이를 수수방관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 선수’ 파문이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할 관계자들이 늘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물의를 일으킨 것은 죄송하지만 미리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우리도 속았다.”

하지만 이는 군색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인터넷도 없고 이메일도 없었던 1980년대에도 ‘가짜 선수’를 판명할 방법이 있었습니다. 1984년 당시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이미 권순천 선수의 타이틀전 직전에 ‘가짜 복서’라는 의혹이 복싱계에 나돌았습니다.

첼시 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첼시 리가 부천 KEB하나은행에 입단하기 전에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이사회의 이사 일부와 여자 프로농구계 일각에서 ‘혈통 사기’ 의혹이 제기됐지만 당장의 성적에 급급했던 소속 구단과 이를 관리 감독해야 할 WKBL은 들은 체 만 체 했습니다. 결국 검증할 방법이 아니라 검증할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 프로스포츠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드는 불순한 시도는 30년 동안 지속됐습니다. 그래도 이전에는 사기 행각이 드러나면 관련 연맹 당사자들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이지 지금 국내 스포츠는 1980년만도 못한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첼시 리 사태와 관련해 WKBL 신선우 총재를 비롯해 단 1명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새 시즌을 맞고 있습니다. ‘가짜 선수’를 검증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데다 ‘나몰라’라는 태도까지 이어진다면 한국 스포츠는 또 가짜에 농락될 가능성이 큽니다.

[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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