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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패션 열정 50년, 성공 척도는 내가 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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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리아나’71세 디자이너 한혜자

집안 어려워 화가 꿈 접고 양재학원

72년 이대 앞에 문 연 의상실 큰 성공

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 뽑혀

“좋아하는 일이기에 열정을 갖고 50년간 몰두할 수 있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중요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지 따져 보세요.”
중앙일보

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 선정을 기념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촉각(Tactus)’전을 열고 있는 한혜자 디자이너. 자연의 질감을 테마로 그동안 창작한 의상 80여 점을 선보인다. [사진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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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복 브랜드 ‘이따리아나’를 45년째 이끌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한혜자(71)씨가 서울디자인재단이 개최한 2017년 봄·여름 서울패션위크에서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된 데 대한 소감이다. 재단은 지난해부터 한국 패션계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디자이너를 선정해 그의 업적을 돌아보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진태옥 디자이너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됐다. 한혜자 디자이너의 아카이브 전시회 ‘촉각(Tactus)’은 다음달 9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다.

그는 지난 18일 인터뷰에서 “역설적으로 패션 디자인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어릴적 꿈은 화가였다.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곧잘 들어 순수 미술을 하고 싶었다. 그는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면서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 좌절감이 컸지만 마음을 다잡고 양재학원에 등록했다”고 말했다. 자매결연을 한 일본의 복장학원으로 유학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솔깃해 오빠의 낡은 바지, 아버지의 헤진 와이셔츠를 자르고 꿰매 새로운 걸 만들기 좋아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시침법부터 패턴 뜨기에 재봉틀 질까지, 옷 만드는 전 과정을 배우며 일본어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결국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유학의 꿈마저 접었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는 없었다. 서울 명동의 양장점에 점원으로 들어가 경험을 쌓은 뒤 1972년 이화여대 앞에 ‘이따리아나’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열었다. 스물여덟 나이에 집 전세금을 빼서 시작한 모험이었는데, 타고난 손재주 덕분에 반응이 좋았다.

“여성스럽고 디테일이 많은 공주풍 옷이 당시 주류였는데 이따리아나는 간결하고 스포티하면서 매니시한 느낌의 여성복을 맞춰 줬거든요. 개성 있다고 소문나면서 손님이 몰렸어요.”

전국 백화점에 입점해 최고 전성기를 누리다가 90년대 들어 유럽 명품 브랜드가 대거 수입되면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이때 그는 해외에 도전했다. 98년부터 2003년까지 뉴욕컬렉션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뉴욕 소호에 매장도 열었는데 1년이 채 안 돼 9·11테러가 일어나면서 결국 철수했다.

이번 전시는 돌·이끼·흙·나무·바람 같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퇴색과 퇴적’이라는 테마로 다양한 질감을 표현했다. 와인잔으로 만든 칵테일 드레스, 불에 탄 웨딩드레스 등 작품 80점은 의상이라기보다 설치 미술에 가깝다.

그는 “미술에 대한 열정이 패션에 조형미를 더한 ‘아트 투 웨어(art-to-wear)’를 만들어냈다”면서 “당장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좌절하지 말고 50~60대가 됐을 때 어떤 모습이고 싶은지 머릿속에 그리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 성공의 척도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박현영.김경록 기자 park.hy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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