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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외환 대한민국… 96년 전 나라 위한 ‘옥중 순국’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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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23) 3월의 함성 9월의 향기… 대한의 딸 유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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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으로 야기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 지난여름의 무더위로 야기된 전기료 누진 폭탄 등으로 머리에 지진이 날 즈음에 경주에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진짜 지진이 일어나 온 국민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다. 하기야 지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관광업계도 흔들리고 보험업계도 흔들린다. 그나마 덜 흔들릴 수 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불 속으로 뛰어들어 20여 명의 이웃을 살리고 정작 본인은 죽고 만 ‘의인(義人) 안치범(28)’씨의 안타까운 소식과 쌀 1천 포대를 기부한 제주도의 '얼굴 없는 기부 천사' 이야기는 그나마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교통사고 피해자를 구하려다 2차 사고로 중태에 빠진 20대 청년의 애석한 소식도 있다.

자연에 의해서든 외침에 의해서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의로운 사람이 나타난다. 3%밖에 안 되는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의인이 백에 세 명만 되어도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소금의 역할은 아무래도 힘없는 백성보다 사회지도층 인사가 맡아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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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작금의 우리 현실을 보면 소위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이라 할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거꾸로 가고 있다. 병역 면제를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는 고위 공직자가 적지 않다고 하는 걸 보면 대한민국은 지진이 아니라도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불안한 나라이다. 외부 문제보다 내부 문제로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면 위기 상황은 더 빨리 오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더 썩기 전에 병을 들추어내고 도려낸 뒤에는 잘 봉합해야 한다.

오는 9월 28일은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19세의 나이로 순국한 지 96주년이 되는 날이다. 여기서는 나이 어린 유관순 학생의 시세 판단과 대응 방법을 통하여 오늘의 거울로 삼고자 한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02년은 대한제국 광무(光武) 6년으로 고종(高宗) 39년에 해당하며,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일본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세력을 떨치던 때로 조선의 국운이 쇠할 대로 쇠해 가던 때였다. 이 해는 여러 문인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소설가로 나도향과 채만식, 시인으로 정지용과 김소월이 태어난 해이다. 그리고 영화인 나운규도 이 해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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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던 때의 유관순 나이는 겨우 9세였다. 1914년(13세)에야 사애리시(Alice Hammond Sharp·史愛理施) 선교사 주선으로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비로소 수학하기 시작하고, 1916년(15세)에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 2년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했다. 이듬해 유관순은 조카를 위해 뜨개질로 모자를 만들어 선물한 일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범하고 순수한 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8년(17세) 3월 18일 유관순은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유관순은 세상을 직시하는 눈을 기르고 불의에 항거하며, 본인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영웅적인 소녀로 탄생한다. 비유하자면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된 것이다.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정오,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의 발표로 시작된 3·1운동을 두 눈으로 보는 순간, 유관순의 운명 나침반은 독립운동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칫 민족대표만의 독립운동으로 그칠 수도 있었지만,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각오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다. 유관순과 같은 독립을 위한 치열한 선구적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2000만 민중이 하나 된 외침을 낼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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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서울에서 다시 아우내로 내려가 독립운동을 준비, 권유하며 매봉산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물론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등도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고,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상처를 입고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만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은 서대문 감옥에서도 옥중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해 9월 28일 오전 8시20분, 유관순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는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히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기에 이른다.

‘나,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의식만 살아있고, 나라가 없던 유관순에게는 오직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내우외환으로 시끄러운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켜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는 28일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묻혀 있는 서울시 용산구(구청장 성장현)에서는 ‘열사 유관순 순국 96주년 및 추모비 건립 1주년’을 맞이하여, 관내 부군당 역사공원 안에 있는 추모비 일원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용산아트홀에서는 유관순 열사 추모예술전을 열기로 했다. 평소 순국열사(殉國烈士)들을 앙모하여 그들의 어록을 붓글씨로 즐겨 써 온 필자는 마침 (사)대한민국공공미술협회(회장 하정민)로부터 추모전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열사 어록 및 창작으로 10점의 작품을 준비했다. 여러 기성 화가들은 물론 용산서예협회(회장 조윤곤)도 참가한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민국 만세! 대한독립 만세!” 유관순 열사의 기도문이다. 한 여고생의 기도라 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감동적인 내용이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절규의 목소리로 유관순의 간절한 애국심과 강렬한 투쟁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대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너희들은 나에게 벌을 줄 권리가 없고 나는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재판을 거부하며 한 말이다.

“선생님!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2000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박애덕 선생님께 쓴 옥중 편지이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북핵 문제, 지진공포, 당정 갈등, 청년실업, 저출산 고령화, 제4의 물결 대응 전략, 조선(造船)업계를 비롯한 옥시·롯데·한진 문제, 대선을 앞둔 정치의 지각변동 등등의 현안을 눈앞에 두고 정녕 우리는 여기서 무엇부터 해야 하나.

약 100년 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유관순 열사가 위기의 대한민국을 일깨우기 위해 용산구 이태원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3월의 함성이 9월의 향기가 되어.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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