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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인터뷰] 김지운 감독 "'밀정은 '콜드 누아르' 붉은빛도 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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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손정빈 기자 = 김지운(52) 감독의 '밀정'은 '김지운 영화같지 않은 김지운 영화'다. 김지운 특유의 스타일리쉬함은 살아있되 그 스타일을 채우는 정서는 전에 본 적 없는 뜨거움이다.

김 감독 스스로도 "차갑게 시작해서 뜨겁게 끝났다"고 말할 정도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항일무장단체 의열단과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결국 '밀정'은 이정출의 마음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단순히 한 인간의 개인적인 내면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무지막지한 흐름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시대의 정서다. 영화는 혼란스러운 세계 속 감정을 따라가기에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김지운 감독을 만나 '밀정'에 관해 들어봤다.

-'밀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영화인가.

"'인랑'이라는 영화를 기획 중에 지난해 2~3월 미국에서 중저예산의 범죄물을 하나 하려고 했다. 배우 캐스팅이 중요한 영화인데, 리스트에 올린 배우들의 일정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자꾸 늘어지니까 더이상 못 기다리겠더라. 어차피 '일랑'은 큰 작품이니까 미뤄두고 그 사이에 할 소품을 하나 찾았다. 그때 '놈놈놈' '장화, 홍련'을 같이 한 최재원 대표가 시나리오를 하나 가져왔고, 그게 '밀정'이었다."

-소품이라고 하기엔 큰 작품이 아닌가.

"(웃음) 당시에는 중간 버짓(budget)의 작품이었다. 시나리오 읽어보니까 소재가 좋고, 이야기가 묵직하고 장중하고 진중한데, 상업적인 요소가 없는 것 같아서 염려됐다. 또 이 인물들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들이 있을지도 고민됐다. 사실 김원봉 선생(극중 '장채산'으로 이병헌이 연기했다)이 의열단을 만들었 때가 이십대 초반이었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젊은 배우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정출'(송강호)이라는 인물은 완숙한 배우가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게 송강호였나.

"아직 이 영화를 할지 안 할지도 몰랐으니까, 처음부터 송강호를 떠올린 건 아니다. 그런데 최 대표가 와서 송강호가 '밀정'에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송강호한테 가서는 내가 이 작품을 할 거라고 했다. 최 대표가 밀정 역할을 한 거다.(웃음)"

-김지운과 송강호가 힘을 합쳤으니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겠다.

"그런 셈이다. 갑자기 박차가 가해졌다. 투자도 됐고. 10월에 상하이에서 첫 촬영에 들어갔으니까, 일이 정말 빠르게 진행됐다."

-시나리오에 상업적인 부분은 어떤 걸 넣은 건가.

"오프닝과 엔딩을 새롭게 넣었다. 또 배신자 척결 장면과 기차 시퀀스를 넣었다. 그렇게 시대극의 묵직함과 기품과 진중함, 스파이물의 재미 이런 게 다같이 만들어졌다."

-시사회 후 기자회견 때, "차갑게 시작했다가 뜨겁게 끝났다"는 말을 했다.

"스파이를 다룬 걸작들을 레퍼런스 삼아서 일종의 '콜드 누아르', 이건 내가 만든 말인데, 그런 차가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성공한 작전을 다루는 작품은 아니니까, 그때부터는 의열단의 인간적인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야 했다. 그러다보니 영화가 뜨거워지더라."

-말 그대로 이전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던 그런 감정들이었다.

"그렇다. 다만 신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뜨거워질 수밖에 없지만, 그 감정을 최대한 영화의 '톤 앤 매너'(tone & manner)에 맞추려고 했다. 다시 말해 뜨거움은 있지만, 그 뜨거움이 과잉되지 않고 애초에 하려던 그 감정선에 맞춰지기를 원했다."

-그 '톤 앤 매너'라는 건 어떤 건가.

"일제 강점기가 최근 반복해서 다뤄졌다. 난 무엇을 다르게 할지 고민했다. 나만의 방식이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룩(look)에 접근했다. 그 당시(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영화는 브라운 계열이다. 그건 식상했다. 이 영화가 '콜드 누아르' 스파이 영화를 표방했으니까, 영화 전체의 색감을 블루와 그레이로 차갑게 만들었다. 배우 피부색도 조절했다. 붉은 빛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런 차가운 분위기를 말하는 거다."

-기자회견 때,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인물이 어디로 가는지 맹렬히 쫓았던 첫 번째 영화"라고 했다. 당신이 말한 뜨거움과 관련 있는 말로 들린다.

"음…이전까지는 어떤 특정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 특정 장면을 보기 위해서 그 장면의 앞뒤를 만들었다. 이를 테면 내가 보여주려고 했던 그 장면이 내 영화적 자의식이었다."

-예를 들어준다면 어떤 건가.

"'놈놈놈'에서 끝없는 질주, 전대미문의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을 만들려고 했다.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리고 쫓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 장면을 만든 거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이 영화가 가야할 올바른 방향을 쫓아간 거다. 난 항상 나의 인장(印章)을 찍는 클라이맥스를 추구했다. 이번에는 이 영화가 가야하는 길, 필요한 걸 찍었다. 즉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필요한 장면을 찍었다."

-올바른 방향, 필요한 장면이라는 건 윤리적 혹은 도덕적 판단이 들어갔다는 의미인가.

"그런 것까지는 아니다. 장르적인, 뭔가 영화적인 수사를 '밀정'에 우겨넣지 않았다는 의미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밀정'은 결국 이정출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의 일련의 감정들이 다소 개연성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정의하는 '시네마'라는 것은 영화만이 가진 독자적인 표현 방식, 그러니까 '미장센'(mise en scene)이다. 이미지로 주제를 전달하는 게 시네마다. 그게 내가 정의하는 영화다. 이정출이 자신의 이야기를 안 할 뿐이지 밑밥은 다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줄 수 있나.

"'김장옥' 에피소드를 봐라. 사상적 동지이자 친구이던 이를 잡아야 하는 심리적 굴절감, 그가 자결하려하자 "장옥이"라고 부르는 것, 죽은 친구의 인명부를 들춰보는 것, '하가시'(츠루미 신고)가 '어려운 시기에 친구가 따로 있나. 손을 내밀면 친구지'라고 말할 때의 이정출의 표정 같은 게 다 그런 거다. 배우가 표정과 시선으로 보여주는 그 예술들, 음악, 사운드, 조명 등 모든 게 합쳐져 완성된 한 장면이 된다. 모든 것에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 걸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 기차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기차 시퀀스는 어떤 걸 말하는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기차라는 건 하나의 흐름이다. 그건 어떤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흐름은 당시를 사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어떤 '프레스'(press)다. 그 시대, 그 기차 안에서 인물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봐라. '김우진'(공유)는 한 방향으로만 간다.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고, 천천히 가기도 하지만 그는 직진한다. 이정출은 다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차 안을 계속해서 왔다갔다 한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방향을 정한다. 이런 거다. 영화는 문학이 아니지 않은가. 인물의 입을 통해서 모든 걸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다."

-송강호와 함께한 네 번째 장편영화('조용한 가족' '반칙왕' '놈놈놈')다. 어땠나. 그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작고한 장진영 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 '반칙왕'을 찍을 때였는데,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선배는 촬영할 때 촬영하고 내려와서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고, 또 촬영하다가 내려와서 아무 말도 없더라고. 장진영 씨는 우리의 그런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그런데 말이 뭐가 필요한가 싶다. 촬영이 잘 되고 있고, 연기가 좋았으니까 별 말 없이 앉아 있는 거다. 본질과 본질이 만나는 거니까 별 문제가 없달까. 송강호의 연기가 좋았다고 내가 엄치를 치켜세울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웃음) 우린 그런 관계다."

-송강호에게 '께름칙한 배우'라고 했다는데, 그건 무슨 의미인가.

"송강호를 처음 볼 때부터 그랬다. 그와 개인적으로 알기 전에, 그가 출연한 세 작품을 봤다.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나쁜 영화', 연극 '비언소' 때다. 큰 역할은 아니었는데, 묘한 호흡을 쓰는 배우가 있더라. 정말 이상한 연기였다.(김지운 감독은 잠시 송강호 흉내를 냈다) 처음엔 동일 인물인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더라. 송강호에게는 이상한 에너지가 있다. 그와 있으면 편한데, 묘한 텐션(tension)이 있다. 내 에너지를 모으게 된다. 그게 송강호의 힘이 아니겠나."

-공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유는 송강호와 연기했고, 짧지만 이병헌과 함께했다. '김우진'은 아주 입체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힘이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그의 연기에 만족하나.

"김우진은 영웅적인 전사가 아니다. 그는 사색적이고 번민하는 인물이며,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을 짊어지는 인물이다. 약한데 강한척 하는 인물이 아니라 약하면 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보여지는 게 김우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진다는 것, 그게 영웅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에게 버거운 롤(role)을 뛰어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유도 김우진과 같은 일을 했다. 공유는 송강호와 이병헌 사이에서 연기했다. 그 압박감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배우와 함께 연기한다는 건 로망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두려움이다. 그런데 공유는 그걸 해냈다. 굳건하게 버티고 싸웠다. 배우로서 내구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병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그의 연기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겠다. 실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의 존재가 '밀정'에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그냥 우려다. 그냥 말을 재밌게 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일 뿐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영화를 훨씬 단단하게 하고, 풍요롭게 할 뿐이다.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 잭 니콜슨이 주연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다. 그 작품에 루이스 플레처가 출연하는데, 그녀가 출연한 장면은 약 10분 정도다. 플레처는 그 연기로 오스카를 받았다. 이병헌은 그런 연기를 한 거다. 매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분량으로 모든 것을 꽉 채우는 연기를 했다. 그게 이병헌의 존재감이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 배우들이 대체적으로 매우 미묘한 연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번에 배우들에게 특별히 주문했던 건 '스몰 액팅'이었다. 나는 원래 '스몰 액팅'을 좋아하지만, '밀정'은 스파이 영화니까 그런 게 더 필요했다. 미묘한 시선 처리, 눈을 마주치는 순간과 피하는 순간, 그때의 표정들. 그 시선을 받아들이고, 또 무화(無化)하는 눈빛. 엄태구, 한지민 등 모든 배우들이 이 연기를 너무나 잘해줬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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