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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관광상품 만든다고… 속도전하듯 왕릉 헤집는 건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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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古都 훼손될 위기] [上]

수십년 걸리는 유적 발굴을 5년내 끝낸다는 경주… "미래 세대에 죄짓는 행위"

- 앞뒤 바뀐 신라 王京 정비·복원

전문가들 "유적 보존이 우선… 관광 활용은 발굴의 부산물"

- 고증·연구할 시간 없는 속도전

월성 발굴만 30년이상 필요한데 8개 유적 동시 발굴땐 부실 우려

- 중국도 진시황릉은 안 파헤쳐

주변의 병마용갱만 발굴·공개… 이집트 투탕카멘묘는 약탈 발굴

"서봉황대와 135호는 마립간 시기 고분묘실의 구조와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형 고분이며 새로운 부장품이 발굴되면 홍보 효과를 통해 국민들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 99호는 천마총·황남대총과 인접해 있는 데다 상당한 유물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쪽샘지구 44호 및 그 외 고분들은 발굴 과정을 일반에게 공개해 관광객을 도심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신라왕경 핵심유적 정비·복원사업 종합기본계획(마스터플랜)'에 따르면, 서봉황대 등 대형 고분 발굴은 천년 고도(古都) 경주의 역사 유적 보존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한마디로 관광객들을 도심에 끌어들이기 위한 관광 자원 개발 목적으로 발굴을 계획한 것이다. 서봉황대, 99호, 100호(검총) 발굴 후 봉분을 원형 복원해 내부를 공개 전시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1217억 들여 대형 고분 발굴·정비

마스터플랜을 검토한 고고학 전문가들은 "특히 한 번도 파지 않은 처녀분인 왕릉급 대형 고분을 5년 안에 5개 이상 파겠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종합기본계획에 따르면 △노동 노서지구의 서봉황대와 135호 고분, 대릉원지구의 99호 고분, 황남지구의 143호 고분, 쪽샘지구의 44호와 그 외 고분들을 새로 발굴하고 △일제가 발굴한 대릉원지구의 검총(100호·정식 내부 발굴은 안함)과 노동 노서지구의 금관총, 서봉총, 식리총, 금령총을 재발굴하며 △이미 발굴돼 전시 중인 천마총을 리모델링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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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예정인 경주 서봉황대 고분 - 지난 19일 경주 서봉총 재발굴 현장에서 작업반원이 곡괭이로 땅을 파고 있다. 오른쪽 뒤에 보이는 큰 무덤이 서봉황대다. 2025년까지 서봉황대 등 왕릉급 무덤 5개 이상을 발굴하겠다는 것이 마스터플랜의 주요 내용이다. /김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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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계획도 나와 있다. ①2016~2020년(단기)에는 서봉총 발굴, 금관총 전시 및 공개, 쪽샘지구 발굴, 대형 고분 재발굴 조사 및 연구 ②2021~2025년(중기)에는 미(未)발굴 대형 고분 새로 발굴, 쪽샘 발굴 현장 공개 및 전시 ③2026~2035년(장기)에는 미발굴 대형 고분 전시 구상 순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자기 나라 왕릉급 고분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파헤치겠다니 제정신이냐"고 지적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제국주의 시절에 약탈 발굴된 이집트 투탕카멘 묘처럼 남의 나라에 가서 저지른 짓이거나 무령왕릉처럼 우연히 발견돼 입구가 뚫렸다면 어쩔 수 없이 발굴해야 하지만 그것도 아주 신중해야 한다"며 "중국도 시안(西安)의 진시황릉은 보존하면서 주변의 병마용갱만 발굴하고, 일본은 왕릉급 무덤을 발굴한 전례가 없다"고 했다. 지금 단계에선 발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학술적 정보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얘기도 했다. 최 교수는 "1970년대 천마총 발굴 과정에서 상당수 칠기·금속 유물이 손상됐다. 현재 기술로 발굴하면 많은 정보를 잃게 되지만 과학이 발달할 미래에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을 것"이라며 "지금 단계에선 꼭 필요한 만큼만 발굴해야 한다"고 했다.

◇"왕릉급 무덤 5개 이상을 5년 안에…기술적으로도 불가능"

사업 기간은 총 20년이지만 새 고분 발굴은 5년 안에 완료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라고 입을 모았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여러 개의 무덤을 한꺼번에 발굴하려면 민간 발굴 기관에 일감을 나눠줘야 하는데 이렇게 중요한 국가 사업을 나눠먹기식으로 민간 기관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면서 "발굴은 곧 파괴다. 한번 파헤친 유적은 돌이킬 수 없는데 우리 세대에 다 발굴하겠다는 건 오만이자 미래 세대에 대한 범죄행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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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1970년대 대학박물관들이 발굴 조사한 대릉원 유물 중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존 처리가 안 된 게 태반이다. 기왕에 정리 못한 유물부터 정리하는 게 순서"라고 했다.

강현숙 동국대 교수는 "일제 때 엉망으로 발굴한 금관총, 서봉총을 재발굴한다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왜 새로 고분을 파야 하는지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 관광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건 발굴 결과에 따른 부산물이지 목적이 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최병현 교수는 "월성만 해도 발굴에 최소 30~50년이 걸린다. 황룡사 서쪽 발굴에 10년 이상, 쪽샘도 20년은 잡아야 한다"며 "8개 유적을 동시에 발굴, 정비·복원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100년은 내다보고 차근차근 발굴하면서 연구 성과가 축적된 후 학계의 고증·연구를 거쳐 어떻게 복원할지 판단해야 하는데 지금 같은 속도전은 매우 우려된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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