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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신안선의 고려청자 7점은 왜, 어디서 선적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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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중국제 도자기로 인식돼 중국 닝보서 실린 듯"

연합뉴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내 수중고고학의 문을 열어젖힌 신안선 발굴은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 개펄에 약 650년간 묻혀 있던 수많은 유물의 깊은 잠을 깨운 역사적 사건이었다.

신안선은 1323년 중국 저장(浙江)성 경원(慶元, 오늘날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博多, 오늘날 후쿠오카)로 향하던 배로, 1976년부터 8년간 이뤄진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 2만4천여 점과 28t 무게의 동전 800만 개가 뭍으로 올라왔다.

원나라 무역선인 신안선의 유물을 종류별로 나눴을 때 가장 많은 것은 중국제 도자기다. 저장성을 비롯해 장시(江西)성, 푸젠(福建)성, 허베이(河北)성 등 각지에서 제작된 도자기 2만여점이 발굴됐다. 9월 4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에 가보면 엄청난 양의 도자기에 놀라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많은 중국제 도자기 사이에서 고려청자 7점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청자들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에 실려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28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신안선 고려청자는 연꽃무늬 매병, 찻그릇, 잔 받침, 베개, 뚜껑 등으로 구성된다. 그중에 높이가 30㎝에 이르는 연꽃무늬 매병은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제작됐고, 나머지 청자는 그보다 반세기 이상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매병은 바닥을 보면 다른 유물에 비해 사용한 흔적이 도드라지게 남아 있다"며 "신안선이 출항할 당시에도 골동품이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서는 이들 고려청자의 선적 장소를 고려가 아니라 출발지인 중국 닝보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주된 근거는 배의 형태다. 신안선은 단면이 V자형으로, 바닥이 뾰족한 첨저형(尖底型) 구조다. 첨저형 선박은 원거리 항해를 할 때는 좋지만, 한반도 서남해안처럼 암초가 많고 물살이 빠른 바다에서는 좌초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선박의 바닥이 평평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고려청자가 발견된 위치도 눈여겨볼 만하다. 인양 당시 청자들은 갑판 아래 창고인 선창(船倉)의 아래쪽에 있었다. 배가 고려에 들러 청자를 실었다면 창고 위쪽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선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또 다른 논거는 고려청자의 개수다. 난파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려에 기항했다면 청자를 7점만 선적했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중국제 도자기와 고려청자의 수를 비교했을 때 고려청자를 아름다운 고급 중국산 자기로 인식해 신안선에 선적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려청자'라는 정체를 알지 못한 누군가가 미감에 반해 몇 점만 일본으로 유통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장성욱 학예연구사는 "닝보에서 멀지 않은 항저우를 중심으로 고려청자가 발굴되고 있는데, 이미 송대와 원대에 많은 고려청자가 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간 듯하다"면서 "당시 닝보는 각종 물산이 모이는 국제적인 시장이어서 고려청자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대의 명품을 골라 정리한 책인 '수중금'(袖中錦)에 청자 중 유일하게 고려청자가 언급돼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고려청자를 선적한 사람들은 상품성과 예술적 가치에 주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내외 학자들의 신안선 연구 성과와 경향을 주제로 9월 2일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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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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