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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밀착취재] "나는 나는 김옥례… 손자가 너무 이뻐, 손자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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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이 래퍼로…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의 매직쇼

한적한 시골 충청남도 부여군 간대리 마을에 요란한 색깔의 우주선이 그려진 버스가 먼지를 날리며 들어온다. “저게 뭐여? 뭔 버스가 저려?” 경로당에 모여 있던 노인들이 관심을 보이며 버스로 모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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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와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부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로 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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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월섭 할머니(왼쪽)가 환한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2012년부터 시작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은 평소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접해보지 못한 농어촌, 도서지역의 어르신들을 찾아 잠시나마 문화 예술의 맛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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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예술정거장에서 예술가 박재현씨가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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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도중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을 찾은 세도보건지소 전순금 간호사가 이명식(80) 할아버지의 치아를 살펴보고 있다. 할아버지는 얼마 전 금연을 시작해 보건지소의 관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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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이야기를 메모장에 적고 있다. 진지함이 묻어난다.


버스가 도착하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예술가와 스태프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분홍색 티셔츠로 단체 무장한(?) 노인들이 조명과 음향시설이 설치된 버스 내부를 둘러보며 어리둥절해한다. 오늘 프로그램은 자신의 이야기를 랩에 담아 풀어내는 ‘속풀이 랩 타령’이다. 예술가 박재현(35), 공도하(24)씨가 능숙한 솜씨로 어르신들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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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씨가 어르신들과 함께 노래부르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랩이 뭐여?”, “음식 싸는 거 아녀~” 들뜬 표정의 할머니들과 달리 할아버지들은 영 불편한 낌새다. 옷도 마음에 안 들고 요상한 모자와 선글라스도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굳었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사로 쓰는 시간에는 속마음을 곧잘 풀어낸다. “뭘 쓴디야?”, “농사 잘됐다고 쓰유~”, “잘되긴 뭐가 잘돼. 뚜드려봐야 알지”, “날이 너무 가물어서 큰일이여. 내 80살 먹었는디 이렇게 가물고 더운 거는 처음이여. 들깨를 많이 심었는디 비가 안 와서 그게 제일로 애로사항이여~” 할아버지들의 장탄식은 농사이야기로 길어진다. 각자 적어낸 메모에는 건강과 농사, 자식 이야기 일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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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쓴 랩 가사들. 갖가지 이야기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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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예술정거장’ 앞에서 어르신들이 랩 손동작을 해보이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분장을 마친 노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랩으로 풀어낸다. “나는 나는 김옥례 사십육년생 눈 아파~ 허리 아파~ 사는 게 힘들어~ 손자가 너무 이뻐 손자 보고 싶다~” 손자 보는 즐거움을 랩에 담아 부르는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3시간의 랩 프로그램이 끝나가자 할머니들이 더 놀다 가라며 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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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담당자인 단동우(42·왼쪽), 손용우(27)씨가 물품을 옮기고 있다. 폭염에 땀이 흐르지만 즐거워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힘이 난다고 한다.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야기 들으며 인생을 새로 배우고 있어요. 농사에 지친 어르신들이 잠시나마 신나게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도움 드리는 것이 제가 할 일입니다.” 연극배우로 활동 중인 박씨는 기뻐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며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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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국도를 따라 이동 중인 예술버스.


어르신들과 짧지만 알차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예술버스가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국도를 따라 다음 행선지로 달려간다.

부여=사진·글 이제원 기자 jw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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