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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1971년 봄, 한 소녀를…” 청중들 녹인 클린턴의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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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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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특파원


“여러분은 오늘 제대로 된 선택을 했습니다. 힐러리는 지금까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변화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8년 전 백악관 문턱까지 갔다가 좌절한 뒤 두 번째 도전에 나선 아내. 그를 지켜봐 온 남편은 차분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아내를 지지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둘째 날인 26일(현지 시간) 오후 10시 10분경 대회장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웰스파고센터는 클린턴 부부에게 누구보다 뜻깊은 자리였다. 미 역사상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된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연단에 섰다.

그는 처음부터 힐러리를 대선 후보로 밀어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1971년 봄, 한 소녀를 만났다”고 운을 뗀 뒤 가벼운 손짓을 곁들여 힐러리와의 연애담, 외동딸 첼시를 얻게 된 과정 등 힐러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말하는 데 42분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다른 연사들과는 달리 속삭이듯 하는 목소리로 마치 아내에게 보내는 공개 연애편지 같은 느낌을 줬다. 첼시가 태어난 날 힐러리의 양수가 터진 이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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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시절 클린턴-힐러리 연애 초기인 1970년대 초반 클린턴 부부의 모습. 1970년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한 이들은 이듬해 사랑에 빠졌고, 1975년 결혼했다. 뉴욕데일리뉴스 홈페이지 캡처


그는 “예일대 로스쿨에서 힐러리를 처음 만났을 때 자석처럼 끌렸다. 나는 베스트 프렌드와 결혼했다”며 “나중에 힐러리 가족을 만났더니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정작 힐러리는 인권운동을 하면서 민주당원이 됐다”고 소개했다. CNN은 “똑똑하지만 차갑다는 평가를 받는 힐러리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라고 해석했다.

자연스레 힐러리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내가 아칸소 주지사였을 때나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힐러리는 언제나 일할 준비가 돼 있었다”며 “대통령직은 고된 일이다. 하나씩 제대로 풀어 가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힐러리는 미국을 위해 최고의 변화를 가져다 줄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25일 전대 시작 후 별로 들리지 않던 ‘힐러리’ 구호가 비로소 전대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체인지 메이커’ 피켓 수백 개도 등장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힐러리는 진짜(darn·‘damn’의 순화된 표현) 체인지 메이커”라며 가벼운 비속어까지 사용하며 분위기를 달궜다.

그가 연설을 마치고 퇴장하자 힐러리가 동영상으로 깜짝 등장했다. 역대 남성 대통령의 얼굴 사진이 슬라이드로 연이어 공개된 뒤 유리 천장이 부서지듯 스크린이 깨지는 효과를 내며 등장해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8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경선에서 진 뒤 “높고 단단한 유리 천장을 깨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분 덕분에 1800만 개(경선 득표 수)의 금이 갔다”고 말한 것과 오버랩 됐다.

힐러리는 “오늘은 지지자 여러분의 승리이고 당신의 밤”이라며 “만약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이 순간을 지켜보는 어린 소녀가 있다면 ‘나는 아마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겠지만 다음 차례(여성 대통령)는 바로 여러분 중 한 명’이라 말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영상 메시지를 보내 클린턴을 응원했다. 그는 “40년 전 건국 200주년이 되던 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며 “민주당은 미국의 도덕적 기반을 위협하는 공화당 대선 후보와는 대조적인 인물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손자 제이슨 씨도 나와 힐러리를 응원했다. 조지 부시, 조지 W 부시 부자 등 전직 대통령 가족이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난주 공화당 전대와는 대조적이었다.

클린턴의 ‘외교 멘토’ 중 한 명인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도 연사로 나서 트럼프를 정조준했다. 그는 “트럼프의 11월 대선 승리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푸틴이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 대해 각각 “훌륭한 지도자”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평가한 것을 거론하며 “트럼프는 이상하게도 푸틴이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들에게 감탄한다”고 비판했다.

전대장에서 만난 클린턴 지지자들은 비로소 전대가 ‘힐러리 축제’로 바뀌고 있다며 안도했다. 뉴저지 주에서 온 애나 크렌스키 씨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원숙하면서 세련된 연설을 계기로 e메일 유출 스캔들로 흔들리던 민주당 축제가 제자리를 잡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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