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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울면 안돼요" 직장서 혼나는 법 배우는 日유토리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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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졸 취업률 97% 넘는데 정작 입사 후엔 부적응 심각, 새내기 사원 32% 3년내 퇴사

경쟁없는 학창시절 보낸 탓에 회사 인간관계·분위기 못 견뎌

"혼났다고 울면 안 돼요!" "일단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면 돼요."

25일 오후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한 강의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녀 회사원 14명이 수첩에 형광펜을 그어가며 강사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었다. 수업 말미에는 2명씩 짝을 지어 상사·부하 역할 게임을 했다. 한 사람이 상사가 돼 부하 직원을 야단치면 한쪽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비는 식이었다. 부하 직원 역할을 맡은 수강생의 표정이 금방 일그러졌다. 지켜보던 남자 강사가 "인상 쓰지 않고 끝까지 참는 게 오늘 수업의 목표"라고 지적했다.

이곳은 일본의 입사 1~2년 차 새내기 사원 대상 연수 프로그램인 일명 '혼나는 법을 배우는 세미나' 현장이다.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강사의 설명을 들은 뒤 서로 역할극을 하며 직장 내 인간관계를 익히는 강좌다. 신입사원 대상 교육 프로그램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처럼 학교나 가정에서 배워야 할 기초 사항까지 가르치는 강좌는 최근 4~5년 사이 생겨났다.

이 수업은 5시간 강의에 1만~2만엔 정도로 강의료가 부담스럽지만 연말까지 예약이 꽉 찼을 정도로 인기다. 회사에서 단체로 강의를 들은 한 남자 수강생은 "학교 때 제대로 못한 재(再)사회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단단히 먹고 배우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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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이런 수업을 듣는 건 '직장 부적응' 때문이다. 올해 일본의 대졸 취업률은 97.3%를 기록해 1997년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취업 이후의 상황은 썩 밝지만은 않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12년 4월 입사 대졸자 기준으로 32.3%가 3년 내 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 명 중 한 명은 3년 내에 회사를 떠난 것이다. 1년 이내 퇴사가 13.1%, 1~2년 이내 10.3%, 2~3년 이내 8.9%였다. 1년도 안 돼 회사를 그만두는 비중이 가장 높았다.

퇴사 사유를 보면 '임금, 근무시간 등 근무 조건 불만(22.2%)' '인간관계 문제(19.6%)' 등이 가장 많았다. '회사 분위기가 적응 안 돼' '상사와 맞지 않아서' 등의 응답도 있었다. 상당수 신입사원이 인간관계로 고민하다 직장을 떠난 것이다. 기대를 안고 직장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들은 적응을 못 해 방황하고, 기업들은 인력 관리에 구멍이 생겨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이 직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과 관련, 일본 사회에선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는 '유토리 세대'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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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2002년 경쟁보다 창의성과 자율성 강화를 내세우는 탈(脫)주입식 교육을 도입했는데 이때 학창 시절을 보낸 게 '유토리(ゆとり) 세대'다. 상대평가제가 절대 평가제로 바뀌고, 학습 내용은 30%, 수업 시간은 10%가량 줄어 상대적으로 경쟁 없이 여유 있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유토리'는 일본 말로 '여유'를 뜻한다. 하지만 학력 저하가 심각해지면서 정부는 2007년 유토리 교육을 폐지했다.

1987년생부터 1996년생에 해당하는 20대 초·중반의 유토리 세대는 4~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 없이 여유롭게 자라 한동안 사회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 일본 제조업체의 홍보 담당자는 "유토리 세대들은 지각은 밥 먹듯이 하면서 퇴근은 빨리 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입사 후 제대로 일을 익히려면 최소 3년은 걸리는데 조금만 수틀리면 그만두니 본인도 회사도 괴로운 일"이라고 했다.

도쿄 롯폰기의 한 커뮤니케이션 학원에서 만난 세미나 강사 아오키(42)씨는 "'대화할 땐 상대방을 보면서 한다' 등 너무 상식적인 내용을 설명해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 신입사원들이 많아 놀랄 때가 있다"며 "어쩌면 개인 잘못이라기보다 학교에서 기본 사항들을 가르치지 못한 게 더 큰 원인"이라고 했다.





[도쿄=최인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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