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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염전서, 축사에서, 밭에서…장애인 노예처럼 당하지만 당국 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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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노동착취·학대 '남의 일'…발생 지역만 '법석'

장애인 인권 유린 반복돼도 지자체 실태조사조차 안 나서

연합뉴스

(전국종합=연합뉴스) 전창해 기자 = 지적 장애인을 노예처럼 부리는 반인륜적 범죄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일명 '○○노예'라 불리는 장애인 인권 유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봉책만 쏟아질 뿐 제도적으로 변화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유난을 떠는 건 사건이 터진 지역뿐이다.

장애인 단체와 전문가들은 장애인의 생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전수조사와 대책, 재발 방지를 위한 가해자 처벌 강화 등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 '차고 노예'·'염전 노예'·'축사 노예'…끊이지 않는 장애인 인권 유린

2014년 초 지적 장애인 채모씨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을 염전에서 구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채씨는 전남 신안군 염전에서 5년 2개월간 수탈을 당했다.

이렇게 사회에 알려진 '염전 노예' 사건의 피해자는 채씨 말고도 90여명이나 더 있었다.

염전 주인들은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달하는 임금을 떼어먹는가 하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혹 행위를 했다.

이들의 지적 능력이 낮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을 악용, 노예처럼 부린 것이다.

최근 충북 청주에서 일어난 '축사 노예' 사건의 실상도 처참하다.

1997년 여름 소 중개인의 손에 이끌려 청주의 한 농장으로 온 고모(47·지적 장애 2급)씨는 이때부터 무려 19년간 무임금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고씨는 이곳에서 '만득이'로 불리며 소를 최대 100여 마리까지 기르던 축사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생활은 악취가 진동하는 2평 남짓한 축사 옆 쪽방에서 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도 농장주 부부는 품삯은 고사하고 일을 못 하면 끼니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다.

경찰은 고씨가 농장주 부부로부터 반인륜적 학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청주에서는 2009년에도 60대 이모씨가 부랑자 생활을 하는 지적 장애인을 자신의 집에 데려가 31년간 임금도 주지 않고 농사일을 시킨 '차고 노예' 사건이 터져 지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 사건 발생한 지역만 '찔끔 대책'…다른 지역은 강 건너 불구경

장애인 인권 유린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수년째 전면적인 장애인 거주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매년 장애인 시설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고 있지만, 시설에 국한하다 보니 수많은 자가 거주 장애인은 조사 대상에서 빠져 있다.

전국적 관심을 끄는 장애인 학대 사건이 터지면 해당 지역이나 분야에 한해서만 '반짝 전수조사'가 이뤄질 뿐이다.

'염전 노예'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랬다.

전남도와 지방노동청, 전남경찰청은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인권 유린 전수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인권 유린 사범이 1년 새 129명이나 적발됐다.

섬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전국적으로 인권 유린 실태가 상당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사는 전국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경찰청 차원에서 전국 염전과 김 양식장, 축사, 수용시설 등에 대한 일제 수색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이 역시 시설에 대한 단발성 조사에 그쳤다.

청주 '축사 노예'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이 터지자 충북도는 내달 말까지 지적·자폐·정신 장애인 소재 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충북도는 이번 조사를 통해 소재 불명자로 확인된 장애인에 대해서는 충북경찰청의 협조를 얻어 지역 관할 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할 계획이다

그러나 충북지역 등록 장애인 9만3천612명 중 지적·자폐·정신 장애인은 1만3천406명에 불과해 전수조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반쪽 조사'라지만 그나마 이런 준비를 하는 지자체는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충분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 복지부, 전수조사 계획 여전히 검토 단계…"처벌 강화 등 근절 의지 보여야"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대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복지부는 청주 '축사 노예' 사건이 터지자 '읍면동 복지 허브화' 정책의 핵심인 '맞춤형 복지팀'이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할 때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인권 취약계층의 인권침해 사례도 발견해 신고할 수 있도록 업무 매뉴얼을 보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맞춤형 복지팀의 업무에 더해지면 지역사회의 장애인 인권침해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복지부는 보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장애인 거주 실태 자료도 없는 현 상황에서 이런 대책이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복지부 관계자는 "장애인 전체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지려면 경찰과 지자체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보니 현재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조사를 벌일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전했다.

장애인 인권 유린 사건이 되풀이되는 이유 중 하나로 '솜방망이 처벌'이 꼽히는 만큼 처벌 규정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앞선 '차고 노예' 사건이나 '염전 노예' 사건 가해자들은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법원은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선처했다.

그때마다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판결이라고 비난이 쏟아졌지만, 여태껏 달라진 건 전혀 없다.

지현상 청주시 장애인단체협의회장은 "음지에 있는 장애인이 인권 유린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장애인 거주지와 생활실태 등을 조사한 뒤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며 "이와 함께 강력한 법 집행에 나선다면 장애인 관련 사건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jeon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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