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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서말 구슬’도 꿰지 못한 한국 IT, 또 뒷북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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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고 열풍에 “우리도 전에 하던 건데…” 기술로 앞서가다 콘텐츠로 추월당해



경향신문

포켓몬 고 이용자가 스마트폰 지도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가 화면을 보자 수집 가능한 포켓몬스터의 하나인 피카츄가 나타난 모습. / 포켓몬 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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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는 일본 업계를 향해 ‘정보기술(IT) 섬나라’라는 뜻에서 “갈라파고스 신드롬에 빠졌다”고 비판해 왔다. 일본 소니 등이 자기 식으로 IT기술을 발전시켜 왔으나 세계 흐름과는 동떨어져 뒤처졌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일본을 비웃을 처지가 못 된다. 최근 세계적 열풍을 몰아온 ‘포켓몬 고’라는 게임은 애플, 구글 충격과는 다른 해묵은 고민거리를 국내 경제에 새삼 들춰냈다. 깅원도 속초 등지에서 눈앞에 나타난 허상인 포켓몬스터들이 아닌 우리의 진짜 약점부터 봐야 할 때다.

포켓몬 고 열풍이 전해지자 ‘국내에도 비슷한 게임이 이미 몇 년 전에 있었다’는 얘기부터 나돈다. KT가 그해 증강현실(AR)을 이용해 내놓은 캐릭터 잡기 게임 ‘올레 캐치캐치’는 포켓몬 고와 흡사한 방식이었다. 앱에서 주변을 비추면 몬스터 캐릭터가 나타나고, 잡으면 캔디나 쿠폰 획득이 가능했다. 온라인게임 ‘창세기전’을 만든 소프트맥스는 2011년 증강현실과 위치기반 기술을 적용한 ‘아이엔젤’을 선보였다. 이런 게임은 색다른 방식으로 잠시 눈길을 끌다가 사라졌다.

이제 와서 ‘우리도 하던 건데…’라는 식의 반응은 그전에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 든다. 사실 국내 IT기업들은 세계 여느 기업보다 앞서 제품·서비스를 선보이며 앞서 나간 적이 더러 있었다. 돌아보면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은 한국 IT업계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주류로 커나가지 못하고 쓴잔을 마셨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는 대변혁의 첫머리에 MP3 플레이어가 있다. 한국 기업이 시장을 이끌었다. 새한미디어에서 분사한 중소기업 엠피맨닷컴이 1997년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 특허를 출원하고 이듬해 제품 엠피맨을 만들었다. 이전까지 개인 휴대형 음악은 소니의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아날로그식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방식으로 들었다. 소니, 파나소닉 같은 일본 업체를 중심으로 MD플레이어도 잠시 나왔다. 일반 CD보다 작은 미니 디스크(MD)를 돌리는 방식으로 음원을 재녹음하거나 편집할 수 있었으나 틈새제품에 그쳤다. 주도권은 MP3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엠피맨닷컴 브랜드는 레인콤(아이리버)에, MP3 플레이어 특허는 미국 시그마텔에 각각 넘어갔다. SK텔레콤은 보고펀드에 넘어갔던 아이리버를 2014년 8월 인수했다. 엠피맨의 마지막 수장이던 김경태 대표는 2007년 <디지털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MP3 플레이어 사업 초기에 활성화를 위해 정부 측과 많은 접촉을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오히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 간 싸움만 벌어져 애플과 중국 업체들에 안방을 내줬다”고 회고했다.

‘IT 생태계’를 제대로 짚어낸 애플 아이팟이 승자가 됐다. 애플은 아이튠스, 앱스토어를 구축해 MP3 음원의 유통경로를 만들었다. 반면 국내 업체는 기기를 만들어 파는 데 급급했다. 서기만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기기는 잘 만들고 할 만큼 했다”면서도 “애플 같은 생태계까지 구축하지 못한 게 국내 기업의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애플은 아이팟을 토대로 스마트기기 제국을 세웠다.

또한 스트리밍 음원서비스인 소리바다는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무릎을 꿇었다. 기기 기반의 기술과 콘텐츠 저작권 문제를 엮어내지 못한 것이다.

새롬기술이 2000년 상용화에 나섰던 인터넷 무료전화 서비스인 ‘다이얼패드’도 아쉬운 대목이다. 인터넷망을 이용해 시외전화와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서비스로 꼽혔다. 대표적 무료음성 통화서비스인 스카이프의 원조 격이다. 2000년 8월 가입자 1000만명을 넘겼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다이어패드를 창업해 나스닥에도 상장됐으나 끝내 좌절했다.

싸이월드가 1999년 내놓은 ‘미니홈피’ 또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앞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시초로 불릴 만했지만 세계적으로 크지 못했다. 왜 실패했을까. 싸이월드는 ‘도토리’라는 사이버머니까지 유통시킬 만큼 선도적이었다. 서기만 위원은 “도토리 같은 건 잘했으나 자기들끼리 잘해먹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미니홈피 안에 갇힌 폐쇄적인 형태도 걸림돌이 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내 판도라TV도 유튜브보다 먼저 동영상 스트리밍서비스를 도입했으나 밀렸다.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현실 화면에 뭔가 덧붙여졌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무슨 대단한 기술은 아니라고 한다. 원초적인 형태라면 방송 카메라의 실제 영상 위에 문자나 그래픽 같은 뭔가를 겹쳐 보여주는 방식이다. 골프 중계 때 공의 궤적을 화면에 입힌 것이 일례다. 전투기 조종석 화면에 보이는 실제 배경 위에 타깃을 설정하는 헤드업 디스플레이(HUD)도 대표적인 사례다. 이 기술은 BMW, 현대차 같은 자동차 운전석 앞 창문에도 적용되고 있다. 증강현실이 대중화된 것은 스마트폰을 통해서다. 길찾기 앱을 켜면 실제 화면에 가게명, 거리나 방향 표시 등이 뜨는 식이다. 이런 기술이 게임에 적용된 게 이번 포켓몬 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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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는 지리정보와 위치를 알려주는 위치확인시스템(GPS)과 기울기와 방향 등을 알려주는 중력센서(자이로스코프)를 기반으로 한다. 스마트폰이 예전 휴대폰과 달라진 점이 바로 자이로스코프를 넣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방향과 기울기 등을 인식하는 덕분에 증강현실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단지 기술에 머물렀다면 응용분야가 한정되거나 발전이 더뎠을 것이다. 다음부터 필요한 게 상상력, 창의성이다. 오래된 게임 캐릭터 포켓몬스터를 스마트폰의 증강현실 기술에 접목해 화면 속 현실에 캐릭터를 불러내겠다고 마음먹은 게 중요하다.

소프트맥스의 아이엔젤이 1년 만에 사라진 이유는 스마트폰 성능이 지금보다 떨어지는 등 부드럽지 않은 문제 등도 있었다. 그럼 2011년에 포켓몬 고가 나왔더라도 실패했을까. 핵심은 따로 있다. 포켓몬의 인기 비결은 20여년 닌텐도가 쌓아온 캐릭터의 지적재산권(IP)에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앞으로 증강현실은 물론 가상현실(VR) 기술과도 맞물려 또 다른 형태의 게임이나 앱이 나타나 열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가 준비돼 있는지 극히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현재 국내 게임산업은 반짝 떴다는 게임이 있으면 너도나도 비슷하게 응용한 걸 내놓기에 바쁘다. 돈 될 때 ‘미투제품’으로 한탕 벌자는 식이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유행이나 좇아가는 식으로는 혁신적인 뭔가를 내놓을 가능성은 낮다.

일본은 슈퍼마리오 등 많은 만화와 게임 캐릭터로 증강현실이든, 가상현실이든 새로운 서비스에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도 우리의 색깔을 내야 하지만 아직 내세울 거라고는 뽀로로나 유행을 타는 한류스타 정도다. ‘뽀로로 고’ 개발 착수 소식이 반가우면서도 걱정되는 이유다.

전해영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기술은 발전할수록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배경처럼 되고, 주목받는 건 콘텐츠 자체가 된다”고 강조했다. 전 위원은 “우리에게는 우수한 기술력은 있으나 쌓아온 글로벌 콘텐츠가 부족하다. 뽀로로는 훌륭하지만 따라하기로 비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한 다국적 IT기업 임원은 “우리는 그동안 제품만 신경쓰고 따라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기술이나 서비스 자체는 10년을 넘기기도 어렵다”며 “당장 돈을 벌기보다는 재미와 이슈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게 약하다”고 말했다.

며칠 전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 이사회 의장이 한 말은 국내 현실을 보여준다. 이 의장은 7월 15일 기자간담회에서 “구글이 한국의 지도데이터를 활용하려면 한국에 서버를 두고 세금부터 제대로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글의 지도데이터 반출 요구는 불공정 게임”이라는 비판이다. 이 의장의 요구는 설득력이 있다. 구글은 한국에서 각종 혜택만 누리고 세금문제 등은 투명하지 않게 열매만 따먹는다는 곱잖은 시선을 받아 왔다. 이 의장 발언의 배경에는 국내 업체들의 위기감도 깔려 있다. 당장 포켓몬 고 같은 게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요 플랫폼이 해외 기업들에게 장악당하고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IT분야의 중요 요소로 ‘C·P·D·N’을 꼽는다. 각각 콘텐츠와 플랫폼, 디바이스(기기),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특히 한국은 기기와 네트워크에서는 잘 따라가거나 앞선다. 삼성, LG의 제품 경쟁력과 초고속 인터넷망이나 LTE 통신망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앞에 두 가지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디지털화가 특징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앞선 경륜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디지털 시대에는 기술이 정형화되는 덕분에 추월이 가능해졌다. 하드웨어는 사서 쓰면 된다.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누가 소비자 욕구를 간파하는 통찰력을 가지느냐다. 포켓몬 고의 인기가 잘 보여준다.

이에 못지않은 걱정거리가 플랫폼 종속이다. 각종 모바일 기기의 운영체제를 장악한 구글의 안드로이드나 PC 등에 깔린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모바일과 PC의 애플 iOS, 세계 동영상 서비스를 압도하는 구글의 유튜브, 세계적 SNS인 페이스북 등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을 비롯해 통신장비 같은 네트워크 사업도 유럽의 노키아, 에릭슨, 중국 화웨이가 장악하고 있다. 앞으로 커질 사물인터넷(IoT) 시대에도 의존도가 높아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순석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은 “우리는 그동안 수직계열화한 자기 영역 울타리를 쳐놓고 경쟁하는 데 익숙한 반면, 세계는 사이버공간을 중심으로 플랫폼을 만들어 장터 전쟁을 한다”고 지적했다. 즉 국내 기업들은 종속적인 협력사를 거느려 자신의 상품, 서비스를 만들어 파는 데 급급해 왔지만 이는 구식 패러다임이다. 실리콘밸리도 과거 개별 기업들이 가진 수직계열화를 해체하고 수평적으로 통합시키는 방식으로 바꿨다.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이 가능해졌고, 경쟁력 있는 기업이 살아남게 됐다. 이순석 부장은 “서초의 유흥가 ‘파미에스테이션’은 과거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훌륭한 공간을 차려놓고 독특한 음식이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몰려들게 만들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마당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플랫폼의 중요성은 더 커졌는데 자칫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사이버 시대에 세계적 플랫폼을 새로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삼성은 아이폰 충격 이후에야 소프트웨어(SW) 경쟁력 강화를 부르짖지만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삼성은 ‘바다’ 실패에 이어 ‘타이젠’이라는 오픈플랫폼을 시도하고 있다. 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는 2015년 스마트폰 OS 점유율은 안드로이드가 81.2%, 애플의 iOS가 15.8%, MS 윈도10 모바일이 2.2%, 타이젠은 0.2%라고 밝혔다.

다급한 삼성은 사내방송 SBC에서 6월 21일과 7월 5일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를 통해 자아비판하고 나섰다. 1편 ‘불편한 진실’에서는 “구글 등 글로벌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고 했다. 2편 ‘우리의 민낯’은 “직급이 올라가면 실무적 소프트웨어를 제쳐두고 관리업무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안일함을 꼬집었다.

한 IT 대기업 과장은 “서열식 조직문화도 문제지만, 협력사와의 관계를 보면 창의성을 기대하기란 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원청이 협력사에 군림하듯 주문을 내리고 비용 깎기부터 하려 드는데, 어떻게 새로운 게 나오겠느냐”고 털어놓았다. 이 직원의 경험담에는 ‘구슬(콘텐츠나 기술)’을 꿰기는커녕 발굴하기도 힘든 현실이 녹아 있다. 위계적이고 고리타분한 조직문화는 우리랑 비슷하지만 쌓아놓은 콘텐츠만으로 수십 년은 먹고살 일본과 여러 스타트업을 키워서 가공할 속도로 달려오는 중국 사이의 틈새도 점점 좁혀지는 분위기다.

한국은 의사, 변호사, 공무원이 먼저 되려고 하며 ‘오타쿠’가 천대받는 사회다. 정작 오타쿠는 2·3차 협력사에서 반값 월급으로 허기를 채워야 한다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서말 구슬을 제대로 꿰지 못했다. 지금은 구슬도 부실하고 줄(플랫폼)마저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게 한국 IT의 현실이다.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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