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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인터뷰] '부산행' 연상호 감독, 하필 '좀비'를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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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한국일보

영화 '부산행'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재난상황에 빗대 한국사회를 비판한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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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이 ‘천만행’ 특급열차에 올라탔다. 영화 속 좀비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빠르게 잠식해가듯 ‘부산행’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리며 관객들을 감염시키고 있다. 20일 하루에만 87만여명을 극장으로 불러모아 개봉일 최고 흥행 기록을 썼고, 유료시사회 관객 57만여명을 포함해 개봉 이틀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000만 클럽 가입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평이 벌써 나온다.

“1,000만 관객? 너무 어머어마한 숫자라 상상이 잘 안 된다.” 공식 개봉 전날인 1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연상호 감독(38)은 의외로 덤덤했다. 80%까지 치솟은 개봉일 예매율을 전해주자 “주변에서 영화가 잘 되겠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다”면서 “내가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 모양”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상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연 감독은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어린이용 또는 가족용으로 치부되던 애니메이션에 사회 비판을 담아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다다를 설립해 ‘발광하는 현대사’와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을 제작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감독과 제작자로 활동해 온 그에게 ‘부산행’은 첫 실사영화다. 전작들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힘의 논리와 뿌리 깊은 계급주의를 고발한 연 감독은 좀비를 소재로 삼은 ‘부산행’에서 한국사회의 지옥도를 직유와 은유로 직조한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실사영화로 넘어오는 사례는 이전에 못 봤다.

“실제로 이런 일이 거의 없다. ‘마리 이야기’의 이성강 감독이 ‘살결’이란 실사영화를 찍었는데, 그 이후로는 내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장르가 확 바뀐 데다 제작비도 100억원대로 덩치가 커졌다.

“투자배급사 NEW에서 큰 결심을 한 거지(웃음). ‘사이비’ 배급과 관련해 NEW와 논의하던 때부터 장경익 영화사업부 대표와 ‘언젠가는 실사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몇 년 후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NEW와 작업했다. ‘서울역’도 좀비영화다. 당시 장 대표가 이 영화를 실사로 리메이크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미 애니메이션이 존재하는데 굳이 똑같은 내용으로 실사영화를 만드는 건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역’과 연결되는 다음날의 이야기를 구상해 역으로 제안했다. 부산행 열차에 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다.”

-이전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사실적인데 ‘부산행’은 어떤 방향으로 기획했나.

“다른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다. 시나리오상의 글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스토리를 짜는 데 한계를 느꼈다. 글이 아니어도 영화적 표현 요소는 많지 않나. 그래서 내러티브에 변곡이 많지 않은 직선적인 이야기로 액션이 스토리텔링을 대신하는 빠른 호흡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부산행’과 ‘서울역’을 그렇게 만들었다.”

-애니메이션 연출과 실사영화 연출은 어떤 차이가 있나.

“크게 다른 건 못 느꼈다.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좋아진 덕분에 영화의 어떤 장면을 상상했을 때 영상으로 구현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앵글이나 숏의 연출 기법도 거의 동일하다. 제작 과정의 방식만 다를 뿐, 설계도는 둘 다 비슷하다. 애니메이션 연출 경험이 ‘부산행’에 도움이 됐다.”

-좀비 역할 맡은 100여명의 배우들을 움직여 원하는 동작과 이미지를 만드는 게 어렵지 않나.

“좀비를 그림으로 그리는 게 더 힘들다(웃음).”

-실사영화 연출을 할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장애나 어려움은 없었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촬영 당시에 배우들과 영화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냥 이러저러하게 연기해달라고 부탁한 게 전부였다. 배우와 작업한 게 처음이라 소통에 서툴렀다.”

-촬영 속도가 빠르고 재촬영이 많지 않아 배우들이 이래도 괜찮은지 의아해했다고 들었다.

“매 회차 촬영 초반부에 좋은 컷이 많이 나왔다. 내가 원하던 그림이니 만족스럽다. 현장 편집본을 본 뒤에 예비용으로 몇 번 더 찍기도 했는데, 그걸 다 합쳐도 다른 감독들보다 촬영분량이 적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러다 보니 제작 일정이 앞당겨지게 됐다. 원래 80회차 촬영하기로 했는데 67회차에 촬영을 마쳤다. 좀비들이 열차에 매달리는 장면의 경우 원래 시나리오엔 없었는데 촬영하다가 추가했다. 그런데도 일정에 여유가 있었다. 제작비도 알려진 것보다 적게 썼다. 남은 돈은 그냥 나 달라고 농담도 했다(웃음). 초반엔 예산이 모자랄까 봐 전전긍긍하며 회식에서도 삼겹살을 먹다가 나중엔 소고기를 먹었다. 한번은 제작부가 일정을 몰아서 짠 뒤에 그날 야식을 준비했는데, 야식 먹기도 전에 촬영이 끝났다. 낮 3시에 끝난 적도 있다. 현장이 쌩쌩 돌아가니까 스태프들이 즐거워했다.”

한국일보

영화 '부산행'은 좀비 바이러스가 전국을 뒤덮은 상황에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다. 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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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감독이 의도했든 안 했든,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연 감독이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를 재난영화의 소재로 끌어들인 점도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무리로 존재하는 좀비는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고, 인간성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을 표상하기도 한다. 부산행 열차는 좀비들이 파괴한 디스토피아 한가운데를 달려간다.

-왜 하필 좀비인가.

“원래 좀비를 좋아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만, 좀비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규모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과 공포가 존재한다. 그들의 생김새도 슬프고, 측은지심 불러일으킨다. 좀비는 무조건 포악한 괴물와는 다르다. 좀비는 가족일 수도, 지인일 수도 있다. 괴물이면서 동시에 희생자라는 의미가 결합돼 있다. 그래서 우리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상적인 인물이어야 했다. 보통 사람이 재난 상황에서 괴물이 되기도 하고 숭고한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유리 벽면을 사이에 두고 좀비와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는 이미지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봤다. 물론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분은 ‘살려고 하는 인간은 연대하지 못하고, 기차를 세우려 하는 좀비들은 연대가 잘 된다’는 말도 하더라. 좀비는 양면성을 갖고 있고, 좀비영화는 사회성을 띨 수밖에 없다.”

-각 인물 캐릭터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들을 대변하고 있나.

“딸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석우(공유)와 자기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용석(김의성)은 사실 서로 닮아 있다. 애초부터 악하거나 선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비슷한 두 인물이 아주 우연한 계기로 갈라진 뒤 서서히 양극단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뒷부분 석우와 용석의 맞닥뜨림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헐크 같은 상화를 연기한 마동석은 이 영화의 장르적 이미지를 담당한다.”

-석우의 직업이 투기자본과 관계 있는 펀드매니저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묵시록적인 측면에서 미국 작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의 주제의식을 우리 영화에 반영하고 싶었다. 대재앙 이후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아버지 세대의 종말과 그 다음 세대의 시작을 조금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장중심 사회였다. 물질적 풍요만을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선 다른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주제를 담아낼 수 있는 직업으로 펀드매니저를 떠올렸다. 석우는 물질문명의 끝자락에 놓인 캐릭터다. 석우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가 종말을 맞이하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본다.”

-그래도 ‘부산행’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희망적이다. 딸의 영향인가.

“만약 다음에 어두운 작품을 연출하면 ‘아이가 사춘기냐’는 얘기를 듣게 되는 걸까(웃음). 물론 (생후 10개월된)딸의 영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연스러운 변화 아닌가 싶다. 이전 작품들에선 사회를 해부해 보여주려 했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서울역’을 통해 이를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작업을 ‘부산행’에서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딸이 자라면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연출작은.

“‘돼지의 왕’이다(웃음). 딸과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꿈이다. 아이가 태어나니까 생각이 복잡해지더라. 그렇다고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이 세상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돼지의 왕’을 꼭 같이 봐야 한다.”

-‘부산행’이 주말 유료시사회라는 명목의 변칙개봉으로 57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사회를 꼬집는 영화가 반칙을 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독립 애니메이션 제작사 대표로서 사실 복잡다단한 심정이다. 내가 연출하거나 제작한 작품들 중에도 개봉일을 못 잡아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아쉬움이 있지만, 배급의 영역과 연출의 영역은 많이 다르더라. 영화산업에 대한 문제라 많이 어렵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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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 연상호 감독 인터뷰.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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