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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빗장 연 쿠바, 끓어오르는 희망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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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스마트폰 NO 신용카드 NO 영어, 3無 여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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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콘은 7㎞의 제방. 파도를 막는 게 말레꼰의 일이라면, 쿠바를 사랑하는 건 우리의 일일지도. / River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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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쿠바는 우기. 단속적으로 내리던 비가 그치고 먹빛 하늘에 푸른 별이 떴다. 자정 넘은 시각. 말레꼰(Malecon)으로 나간다. 파도를 막는 제방. 이렇게 번역하고 나면 건조해 보이지만, 수도 아바나(Habana)의 다른 어떤 곳도 말레꼰보다 더 매혹적인 곳은 없다. 말레꼰 위에 앉아 도심을 등지면 바다, 바다를 등지면 도심. 1500년대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아바나를 지켜온 바로크, 네오 클래식,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들이 눈 앞에 있다. 도시 외곽이 아니라, 도심 한 복판에서 푸른 파도를 견뎌내고 있는 7㎞의 희귀한 제방. 1901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니, 말레꼰이 막아낸 게 파도 뿐이었을까. 1932년부터 쿠바를 편애한 작가 헤밍웨이의 폭음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의기투합했던 1959년 혁명의 과열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88년만에 이 곳을 찾은 2016년 3월 오바마의 지나친 낙관까지도, 말레꼰은 묵묵히 참았다.

낮의 과열을 식히고 있는 밤의 말레꼰을 걷는다. 열정에 들려 서로를 탐하는 남녀, 야상곡(夜想曲)이라도 듣는 양 이어폰 꽂고 바다를 응시하는 사내, MLB 마이애미 말린스의 낡은 모자 눌러쓰고 수면중인 은발의 노년이 차례차례 스친다. ‘말린스’ 옆에 슬쩍 걸터 앉는다. 투명한 날에는 바다건너 플로리다 키웨스트도 보인다던가. 1959년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켜온 나라, 그리고 이제 그 빗장을 막 열기 시작한 나라, 쿠바다.

◇No 스마트폰 No 신용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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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953년형 핑크빛 뷰익으로 말레콘을 달린다. / 아바나(쿠바)=어수웅기자 ② 손으로 시가를 마는 즐거움. / Rivero 제공 ③ 체 게바라와 라울 카스트로는 아바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 River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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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강제로 폰 스택(Phone Stack)을 하게 해 주는 도시군.”
옆에서 치킨 샌드위치를 먹던 런던 친구 사라가 키득거린다. 폰 스택은 일종의 스마트폰 금지 게임. 액정이 아니라 서로에게 집중하라는 취지로 각자의 스마트폰을 한 바구니에 담는다. 참지 못하고 자기 스마트폰 먼저 꺼내는 사람이 진다. 스마트폰 중독 사회의 한 단면인데, 아바나에서는 그런 게임이 필요없다. 데이터로밍은 커녕, 와이파이 핫스팟(hotspot) 만날 가능성도 거의 로또의 확률이니까.

스마트폰 구글맵(map)이 아니라 종이 지도를 들고 아바나 비에하(Vieha)를 걷는다. 1982년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바나의 구도심이다. 아르마스(Armas) 광장에서 숨을 돌린다. 1519년 스페인 통치시절 처음 건설됐다는 만인의 광장. 세상의 속도와는 관심없다는 듯, 중고책 노점상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작가 헤밍웨이의 단골 작업실이었던 아모스 문도스 호텔이 저 앞에 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오비스포(obispo) 거리 끝이다. 이 거리의 건축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을 떠올리게 만드는 파스텔톤 색의 향연. 눈부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당신이 찾아야 할 곳은 아바나다. 뉴욕이건 런던이건 방콕이건 서울이건, 스타벅스와 맥도널드와 스마트폰으로 요약되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 하지만 50년 넘게 사회주의를 실천해온 쿠바에서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로의 여행. 일부 예외는 있지만, ‘자발적 결별’을 가능하게 해 주는 3무(無) 여행이다. 스마트폰, 신용카드(대부분 현금만 받는다), 그리고 영어(공용어는 스페인어다). 아바나에서 당신은 온전히 풍경에게, 상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1953년형 핑크빛 뷰익.

아르마스 광장을 나와 까삐똘리오(Capitolio)로 걷는다. 1929년 완공된 쿠바의 국회의사당. 관광객에게 익숙한 지명으로는 비에하에서 센트롤 아바나로의 이동이다. 의사당 앞 플라자 호텔과 인그라테라(Inglaterra) 호텔에는 외국인 관광객용 택시가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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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그라테라호텔 앞에 도열한 외국인 관광객용 올드 클래식 택시들. 뷰익 시보레 캐딜락 폰티악부터 핑크 라임 오렌지 블루 등 브랜드와 색의 향연이다. / 아바나(쿠바)=어수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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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과 형광색의 향연. 다른 나라라면 박물관에서나 보관되어 있을, 그 유명한 쿠바의 올드 클래식카다. 겨자색 캐디락과 라임색 시보레 사이에서, 1953년형 핑크빛 뷰익을 골랐다. 드라이버의 이름은 호세 마르티. 쿠바 건국 영웅의 이름을 따왔다고 했다. 중년의 사내가 “아버지는 클리블랜드에서 사는 미국인이고, 중학생인 내 아들은 마이애미에서 공부한다”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지만, 자기는 ‘기러기 아빠’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

1959년 혁명 이후 쿠바는 꽤 오래 잘나갔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쿠바 역시 추락했다. 소련 아니 러시아는 석유를 포함한 지원을 끊었고, 추락 위기에 빠진 피델 카스트로는 소위 ‘특별 시기’(periodo especial)를 선포했다. 인민들에게 세 가지 자유를 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택시, 식당, 민박.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호세가 택시를 시작한 것도 그 이후였다.

버스 등 대중교통이 불편한 아바나에는 두 종류의 택시가 있다. 하나는 외국인용, 또 하나는 내국인용. 이렇게 구분한다. 광택제 칠해 반짝거리는 클래식은 외국인 용, 광택 없이 자기가 직접 페인트 칠한 클래식은 내국인 용. 외국인용 택시 가격은 당연히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른다. 호세의 뷰익은 1시간에 25쿡(CUC·약 3만원). 비싼 대신 택시의 의무, 즉 원하는 주소까지의 문전연결이 가능하다. 내국인용 택시는 겨우1쿡(약 1200원). 하지만 문전연결은 커녕 좌회전과 우회전 그리고 유턴도 없다. 무조건 직진. 원목적지에 가려면 직진하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려서 자기 몸으로 좌회전과 우회전을 걸어서 해야한다. 당연히 합승 가능. 딱 한 번 용기를 내서 내국인용 택시를 탔다. 흰색과 녹색을 조각보처럼 칠한 구식 시보레. 놀랍게도 차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아래로 흙빛 아스팔트도 함께 달린다. 시속 30㎞가 넘을 때마다 글로브 박스가 텅텅거리며 열린다. 운전하는 드라이버도 씩 웃는다. 비바, 쿠바 리브레(Viva, Cuba libre:자유 쿠바 만세)

◇혁명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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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② 아바나 거리의 뮤지션과 채소 시장. / Nestor Kim 제공 ③ 혁명광장 인근 내무부 건물 외벽의 철근으로 형상화한 체 게바라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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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여행지는 크게 셋으로 나눈다. 구도심 비에하, 센트롤 아바나, 그리고 신도시 격인 베다도(Vedado). 호세의 택시를 타고 베다도에 있는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을 찾았다. 이 곳엔 8층 높이의 체 게바라(1928~1967)가 있다. 내무부 빌딩 건물 외벽에 철근으로 형상화한 체 게바라의 거대한 얼굴. 아르헨티나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 모든 가난한 자들의 구원을 꿈꿨던 사내. 조국의 울타리를 넘어, 쿠바와 아프리카까지 혁명을 수출하려던 사내. ‘8층 체 게바라’ 아래에는 스페인어로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고 적혀 있다. 아바나에서 체(친구라는 뜻)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품에 체 게바라가 있다. 시가, 티셔츠, 모자, 열쇠고리, 텀블러, 아르마스 광장에서 팔던 노점 헌책방의 책 표지에도.

다시 핑크빛 뷰익을 타고 비에하의 혁명 박물관을 찾았다. 1959년 혁명 이전까지 대통령 궁이었던 건물. 입장료는 10쿡이었다. 1만원 넘는 가격인데, 영수증을 주지 않았다. 티켓 부스와 10 남짓 떨어진 메인 계단을 올라 입장하려는데, 또 한 명의 제복입은 공무원이 표를 요구한다. 이미 요금 냈다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 짐짓 화를 내자, 제복의 사내가 전략을 바꾼다.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원을 만든다. 이제는 혁명은 쿠바 자본주의의 동력일까.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의 ‘혁명을 팝니다’가 떠오른다. 메인 계단 표지판에는 “독재자 바티스타를 겨냥한 혁명군의 총알 자국이 계단 곳곳에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비바 쿠바 리브레

아이러니와 모순이 혼재하는 나라.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변호사와 의사와 혁명 박물관 집표원의 월급차이가 거의 없는 나라. 외국인용 택시기사와 민박 주인은 달러와 유로를 쓸어담는다는데, 그럴 능력이 없는 공무원들이 느끼는 열패감이란. 하지만 카스트로 정권이 고민 끝에 열었다는 빗장은 쿠바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으로 보였다. 미국과의 국교 회복과 함께 2015년 4월 서비스를 시작한 숙박 공유 사이트 에어비앤비(Airbnb)에는 1년만에 5500가구가 회원 가입을 신청했다고 한다. 작년 한 해 1만3000명의 미국인이 이 사이트를 통해 쿠바에서 묵었고, 올해 3월부터는 다른 나라 국민들도 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베다도에서 에어비앤비로 방을 빌려주는 모녀를 만났다. 러시아계 모친을 둔 20대 후반의 일레인(Eliene). 그녀는 얼마전까지 스페인에서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고 한다. “고인 늪같던 조국을 떠나 바르셀로나에서 미래를 꿈꿨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쿠바의 바뀐 공기는 그녀에게 새 희망을 품게 했고, 스페인 생활 5년만에 다시 귀국했다. 지금 일레인의 꿈은 채식주의자 전용 레스토랑을 여는 것. 자신이 비건(vegan·우유와 달걀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아직 아바나에는 전용 식당이 없어서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비에하에서 아트샵(artshop)을 운영하고 있는 다이아나(Diana) 역시 마찬가지. 브라질에서 일자리를 찾았던 다이아나 역시 부푼 꿈을 안고 돌아왔다. 그녀가 새로 연 디자인샵 이름은 ‘99% 쿠바 디자인’. 다이아나가 만든 셔츠, 모자, 가방, 운동화에는 체 게바라도, 피델 카스트로도 없었다. 판에 박힌 관광객용 디자인도 없었다. 대신 쿠바라는 이름의 열정이 반짝거렸다.
성장이 멈춘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청년들의 이런 열정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스마트폰도 신용카드도 없었지만, 반짝거리는 열정이 이 안에 있다. 뒤늦게 자본주의를 시작하지만,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쿠바. 그 숱한 아이러니와 딜레마 극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비바 쿠바 리브레!

쿠바 맛·멋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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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다르 도나 유티미아(Dona Eutimia) 팔라다르는 쿠바 정부가 개인에게 허용한 소박한 식당. 쉽게 말해 쿠바 밥집이다. 구도심인 비에하의 아바나 대성당 광장(Plaza de la Catedral)에 있다. 장조림처럼 찢은 '로파 비에하(ropa vieha)'를 꼭 맛볼 것. 양파 고추 토마토 소스로 만든 양고기 스튜다. 향긋하고 부드럽다. 8cuc(약 만원). www.facebook.com/donaeutimia

라 과리다(La Guarida)
이 집에서는 요리와 분위기를 함께 먹어야 한다. 1층 입구로 들어갈 때만 해도 폐가를 방문한 듯하지만, 대리석 계단으로 2층에 오르면 기막힌 레스토랑이 반긴다. 쿠바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아카데미 외국어 부문상 후보에 오른 영화 '딸기와 초콜릿'을 이 레스토랑에서 찍었다. 바닷가재 찜 22cuc. 센트롤 아바나 소재. www.laguarida.com/en

카페 마드리갈(Café Madrigal)
전직 영화감독이 운영하는 카페 겸 술집. 헤밍웨이가 첫 모금에 반했다는 칵테일 모히토<사진>와 쿠바 리브레(자유 쿠바)가 이름났다. 신선한 라임과 럼, 그리고 콜라와 쿠바 럼의 화학작용을 음미할 수 있다. 신도시 베다도의 주택가 소재. 2cuc.madrigalbarcafe.wordpress.com

엘 코시네로(El Cocinero) 신도시 베다도에서 가장 떠오르는 레스토랑. 오일 공장 건물을 헐지 않고 리모델링했다. 매혹적 굴뚝이 있고, 2층 야외 테라스가 근사하다. 망고 나무 그늘 아래 먹을 수 있다. 그릴에 구운 치킨 샌드위치 5cuc.www.facebook.com/ElCocinero.Habana/

FAC 엘 코시네로 바로 옆 건물이다. 쿠바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 미술과 비디오 아트, 춤, 대중음악 공연 등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쉽게 말해 클럽과 전시장의 결합 형태다. 말레콘에서 지루해지면, FAC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 새벽 3시까지 연다. 칵테일 2~3cuc 수준. www.fac.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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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식으로 환승해 아바나까지 입국이 가능하다. 마이애미를 경유하는 방법, 밴쿠버를 경유하는 방법, 파리에서 환승하는 방법 등이 있다. 파리 환승을 이용했다. 드골공항 체류 3시간 포함, 23시간.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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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민박 예약은 숙박 공유 사이트 에어비앤비(Airbnb.com)를 통해서였다. 16세기 이래 스페인 지배를 받은 쿠바는 바로크 아르누보 네오클래식 등 다양한 예술 양식의 건축물이 도심을 장식하고 있다. 아파트가 거의 없는 나라. 민박의 매력이 있다.

외국인용 현지 통화는 쿡(Cuc). 달러는 10%의 추가 환전 수수료를 받으니 유로를 가져가는 게 유리하다. 28일 현재 100쿡=90유로. 대략 1쿡=1169원.

[아바나(쿠바)=어수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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