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한국전쟁 발발 직후 100일…전쟁소식은 어떻게 전파됐나

댓글 6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불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 청취·면대면 입소문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슬기 기자 =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7시. 국방부 정훈국은 국영 중앙방송국을 접수하고 아침방송을 중단했다. 임시뉴스로 남침 사실이 발표됐다. 자세한 전황은 모른 채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난 사실만 알게 됐다.

하지만 민심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 이튿날도 대대적인 피란 행렬은 없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야구경기가 진행될 정도였다.

1949년 내내 38선 인근에서 남북한의 충돌이 계속됐기 때문에 그날의 남침도 그 연장선으로 여겨졌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북한 인민군의 서울 점령, 그해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수복까지 서울 시민들은 어떻게 전쟁 소식을 접하고 전파했을까.

25일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김영희 책임연구원의 논문 '한국전쟁 초기 전쟁 소식 전파와 대응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르면 전쟁 발발 소식은 국영 라디오방송을 통해 처음 보도돼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졌다.

◇ 6월 25∼27일…전쟁 초기 3일

6월 25일 일요일 오후, 을지로 6가 라디오 가게 앞은 뉴스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가정집에도 전기가 들어와 라디오를 켤 수 있었다. 낮에 전기가 들어오는 경우는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방송을 할 때 외에는 드문 일이었다.

이튿날인 26일에는 하루 동안 호외가 두 번 돌았다. "괴뢰군의 38 전선에 긍한 불법남침."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흘째인 27일 새벽 라디오에서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가 수도를 수원으로 옮긴다는 내용의 특별방송을 했다.

민심이 불안해하자 천도 소식은 취소됐고, 오전 10시 국방부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반격에 나섰다는 특별발표를 보도했다. 이는 사실과 달랐다. 당시 북한군은 이미 서울 미아리고개에 접근해 있었다.

사흘째에는 불안한 분위기가 도시에 팽배했다.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를 원했지만 자꾸만 가까워져 오는 포탄 소리의 현실과 보도는 달랐다.

미국이 운영한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 미군이 운영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 일본 NHK 등에 의지했다.

서울 주요 신문들은 27일까지는 급박한 전시 상황을 보도하고 호외도 발행했다. 하지만 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신문 발행은 중단됐다.

그 후 9월 28일 서울이 다시 수복될 때까지 서울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남한의 미디어는 부산으로 피란가서 운영한 중앙방송뿐이었다. 그마저도 전쟁 초기 출력이 너무 약해 서울에서는 듣기 어려웠다.

◇ 북한 인민군 서울 점령…9월 28일 서울 수복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부터 방송국부터 접수했다. 오후 9시 북한 혁명송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일성의 서울 해방 축하문이 방송됐다. 평양중앙방송국 프로그램도 중계됐다.

북한 정부의 기관지 '조선인민보'와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해방일보' 등이 창간했고 평양에서 발행하는 '로동신문', '조선인민군'도 서울에서 배포됐다.

김영희 연구원은 "북한은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각종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며 "신문은 각 동과 직장에서 자료로 활용되거나 동원행사에서 배포되는 경우도 있고, 학생들의 교양 강좌 교재로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방송 아나운서였던 위진록은 후에 회고록에서 단파 라디오를 숨죽여 듣던 급박한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낮에는 마루 밑에 가마니 두 장을 깔고, 소형진공관 6개가 들어간 중파와 단파 수신기 라디오를 통해 일본 NHK를 들으면서 숨어 지냈다"고 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한다는 소문은 서울에서 9월 초순경 떠돌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발각되면 공산당원에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단파수신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총살당한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몰래 들은 라디오에서 얻은 전황 소식은 쉬쉬하는 가운데 입에서 입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 3만대 라디오에 의지했던 1950년 6월 서울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당시 서울에는 약 3만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있었다. 라디오가 전쟁 초기 서울 주민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접촉 수단이었다.

서울 수복 이후 1950년 11월 미국이 심리전 전문가들을 서울에 파견해 조사한 결과에서도 서울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의 심리전 효과가 삐라를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라디오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는 포로의 경우 라디오보다 삐라의 심리전 효과가 높았다.

김영희 연구원은 논문에서 "전쟁 당시 라디오 청취는 인민군이 단속하는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뉴스를 들으며 희망을 가졌다"며 "이런 대응은 북한 점령 기간 많은 사람이 북한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wis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연합뉴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