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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돈이 지배하는 사회…‘징벌적 배상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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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 계기로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목소리 커져



경향신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이 2014년 8월 국회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과 피해자구제특별법 통과 등을 요구하며 성명서를 읽고 있다. /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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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근본 질문은 뭘까. 바로 한국에서는 ‘목숨 값’이 너무 싼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기를 치든 뭘 하든 돈만 두둑이 챙겨서 뜨면 그만인 사회. 재수 없이 걸려도 벌금 조금 내면 자식 세대까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세상. 이런 곳에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을 딛고 돈부터 벌어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마련이다. 이런 우리의 민낯을 무고한 아이들의 싸늘한 주검에서 비춰보게 됐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계기로 국내에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이는 옥시 같은 기업에 단지 재산상 부담을 더 주자는 차원을 넘어선다.

재클린 폭스라는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에 살던 여성의 사례는 미국인과 한국인은 억울한 죽음의 대가마저 판이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폭스는 존슨앤존슨(J&J)의 땀띠용 파우더(탤크 파우더)를 쓰다가 3년 전 난소암 판정을 받아 2015년 10월 사망했다. 그는 35년 동안 이 파우더 등 존슨앤존슨 제품을 써 왔다. 미주리주 연방법원은 올 2월 폭스의 유족에게 7200만 달러(약 850억원)를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직접 피해액으로 1000만 달러, 징벌적 손해배상액으로 6200만 달러를 산정했다.

폭스가 한국에서 같은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국내는 배상금을 산정할 때 ‘일실이익(수입)’과 위자료, 치료비, 장례비 정도가 기준으로 적용된다. 일실이익이란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면 일을 해서 벌었을 이익을 추산한 개념이다. 의사 같은 전문직이 아닌 평범한 여성이 나이 60세를 넘으면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국내는 간주한다. 국내에서 60세가 넘은 폭스라면 일실이익은 인정받지 못한다. 위자료는 대체로 기준점이 8000만원이며 상한선은 1억원을 적용해 왔다. 장례비도 300만원이 통용되다가 최근 500만원 정도다. 미국은 병원 치료비가 높은데, 이 부분을 빼면 폭스의 경우 국내에서 사망 배상금은 1억원이 못될 수도 있다.

118억 대 1억원. 회사 측이 항소하면 배상금이 줄어들 공산이 있지만, 단순계산 시 미국 대 한국의 60대 몸값 차이다. 아무리 사법체계가 다르다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터무니 없이 낮게 책정된 게 한국 현실이다. 물론 징벌 배상액까지 더하면 850억원 대 1억원이다.

그럼 국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얼마나 배상을 받을까. 다수 피해자가 어린이들로 알려졌다. 그의 일실이익은 낮게 인정된다. 아이가 숨지면 여성은 20세부터, 남성은 군대 다녀온 22세부터 60세까지 살아서 일했을 경우를 상정해 수입을 계산한다. 이 아이가 회사원이 됐을 수도, 의사나 판·검사가 됐을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일용노동자로 추정한다. 도시 아이라면 도시 일용노임, 농촌 아이는 농촌 일용노임으로 평가한다. 예컨대 도시 일용노임이 월 121만원이라면 5억8000만원 정도로 계산된다. 이 돈을 다 받지도 못한다. 생활비를 빼는데, 수입의 3분의 1로 친다. 그러면 4억3500만원. 다시 배상금을 일시에 받기 때문에 ‘중간이자’를 빼낸다. 또 본인 과실이 일부(%)라도 있다면 그만큼 제외된다. 여기에 위자료, 장례비 등을 더하는 식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미국에서 아이가 사망했다면 얼마를 보상받을지는 우리로선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옥시 같은 회사는 미국에선 문 닫아야 할 가능성도 있다.

배상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국내도 위자료를 더 높게 책정하는 방안이 요구된다. 대법원은 7월 15일 대전지법에서 ‘2016 전국 민사법관 포럼’을 열어 ‘불법행위 유형에 따른 적정한 위자료 산정방안’을 논의키로 했다. 악의적 범죄에 위자료를 높일지 주목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생명을 경시했다면, 존중 또한 돈으로 보장받는 게 합당하다. 즉 돈이 주인인 사회에서 가해자 잘못은 철저히 충분한 돈(배상금, 벌금)으로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구가해온 한 원천이다.

국내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데 몇 가지 논쟁거리는 있다. 먼저 국내 법체계상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신석훈 기업연구실장은 “손실에 직접 민사상 배상을 하면 되는데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하는 것은 형사 처벌을 가중하는 방식”이라며 “행정부 과징금까지 더할 경우 3중 처벌이 된다”고 지적했다. 신 실장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같은 영·미법 체계에서 발달해 와서 우리가 따르기에는 맞지 않다”고도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영·미법, 대륙법 체계의 구조적 차이 문제로 규정하는 건 한계가 있다. 중국과 대만 등지도 이 제도를 적용하고, 한국도 2011년 하도급법을 비롯해 기간제법과 신용정보법에 피해의 3배까지 배상토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일부 도입됐다.

이혜경 국회 입법조사관은 “형사제재 등이 이중처벌 금지 원칙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소송 남발 우려에 대해서는 “징벌 배상액을 제한하는 방식 등의 제도 설계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3조의 ‘이중처벌 금지’ 원칙은 국민의 기본권 특히 신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가 행하는 모든 제재나 불이익 처분이 포함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1994년 결정했다.

징벌적 배상금액을 실제 손실 배상액의 몇 배로 할지도 검토 대상이다. 한국소비자원 박희주 법제연구팀장은 2014년 ‘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 법제 및 사례 연구’에서 “미국도 보통법의 징벌 배상액은 한정하지 않지만, 연방대법원에서는 10배를 초과하는 징벌 배상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25개 주에는 상한을 두는 법이 있다”고 밝혔다. 박 팀장은 “전보배상(실손해 배상)의 10배 안에서 판사 재량에 맡기는 게 합리적이다”라고 제안했다. 어느 정도까지 배상을 요구할지는 벌금이나 과징금, 가해자 재산상태 등을 고려하면 된다.

특히 중요한 원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남는 재산상 이익이 피해 보상액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중에 들켜서 배상을 하더라도 훨씬 남는 장사가 되는 지금 같은 체제라면? 비슷한 제2·제3의 옥시를 키우는 꼴이 된다. 민변, 참여연대 등 6개 시민단체는 5월 11일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한다면 가해자는 ‘불법행위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돼 이후 잠재적 불법행위를 억제 및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홈플러스는 경품행사를 하며 응모자 개인정보를 보험사에 팔아 232억원을 챙겼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5년 4월 표시광고법 위반으로 홈플러스에 과징금 4억3500만원을 부과했다. 참여한 1074명이 소송에서 이겨도 30만원씩 총 3억2000여만원만 받는다. 올해 1월 1심 재판부는 홈플러스의 손을 들어줬고 2심이 진행 중이다. 응모권에 개인정보 활용 동의 사항을 1㎜ 깨알 크기로 써서 미리 알렸다는 점이 받아들여졌다. 이런 경우라면 홈플러스가 패소하더라도 금전적 부담이 별로 없다. 김성진 민변 민생경제위원장(변호사)은 “불법행위로 얻은 이익이 100인데 피해 배상으로 10만 물어낸다면 기업은 반성하지 않게 된다”며 “배상하고 남는 게 없어야 악의적 행위를 징벌하는 차원을 넘어 유사한 사고를 예방하는 의미가 커진다”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피해자가 전부 가지는 게 옳으냐는 질문도 있다. 징벌적 배상액의 상당수는 사회 몫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징벌 배상금의 일정 부분은 ‘소비자 기금’ 같은 데 적립한다. 재클린 폭스 사례도 3100만 달러는 미주리주 범죄희생자보상기금에 보내질 예정이라고 외신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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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실익을 담보하려면 피해자 입증책임 완화, 가해자의 정보제출 의무화, 적용분야 확대, 집단소송제나 소멸시효 보완 등이 같이 맞물려 있다.

어떤 분야까지 도입할지는 법체계상 일반법인 민법에 징벌 배상제를 넣으면 가장 간단하다. 그러나 대상이 너무 확대된다. 한국법제연구원의 2012년 전문가 대상 조사를 보면 소비자법, 경쟁법, 식품위생법, 개인정보보호법, 환경법, 제조물책임법, 금융법 순서로 우선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나온다.

그럼 어떤 행위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어야 할까. 일반적 손해배상은 고의는 물론 과실에도 적용된다. 징벌적 손해배상에는 악의는 물론 의도적으로 모른 척한 ‘미필적 고의’도 포함하자는 주장이 많다. 다만 고의 없는 ‘중대과실’까지 포함시킬지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2007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를 낸 삼성중공업 등도 징벌 배상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다.

징벌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잘못임을 입증해야 한다. 법체계상 입증 책임은 문제를 제기하는 원고, 피해자에게 있다. 옥시는 2000년 10월 가습기 살균제를 내놓을 때 용기에 ‘살균 99.9%-아이에게도 안심’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하여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같은 광고문구를 넣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으로 전문가인 신현우 당시 대표(불스원 부회장)가 재직 시 만든 제품이다. 가습기 살균제나 자동차 같은 고도의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일반인이 입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자동차 급발진 의심사고의 경우 2005년 서울의 대리기사 박모씨는 사람을 숨지게 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차 급발진 때문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 단지 운전자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급발진 원인을 규명한 판례는 없다.

이때 등장한 논의가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결함을 증명하지 못해도 ‘합리적 추정’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다. 2012년 법무부 제조물책임법 개정위원회가 마련한 시안은 ‘①정상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고, ②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에서 초래됐으며, ③제조물 결함 없이는 통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증명하면 결함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했다. 아니라면 제조자가 ‘다른 원인으로 손해가 발생한 사실’을 증명토록 했다. 다만 이는 시안에 그쳤을 뿐 진전되지 못했다.

특히 중요 정보는 가해자 기업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이 오래돼 자료가 없다’거나 ‘지워 버렸다’면 난감해진다. 박동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명 책임을 완화하더라도 여전히 피해자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에 추가 제도가 필요하다”며 “제조자의 정보제출 명령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업 측은 기술·비밀 유출 등을 들어 이를 반대한다. 박 교수는 “법원이 정보의 종류와 범위를 제한할 수 있고, 피해자가 공개하지 않고 제3자가 조사토록 하면 된다”고 밝혔다.

집단소송의 확대도 최근 같이 거론된다. 좌혜선 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국장은 5월 25일 국민의당 김관영 의원이 마련한 제조물책임법 토론회에서 “피해자 개인이 피해 구제를 위해 모두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비용부담 등이 크다”며 “피해자 일부가 승소해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소송제가 징벌적 손해배상의 실효성을 높인다”고 말했다. 국내는 2005년부터 증권 관련 집단소송만 인정하는데, 제조물 등에도 확대하자는 주장이다.

일찍이 김대중 정부 때 출범한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추진하던 이런 해묵은 숙제는 결국 정치권이 풀어야 한다. 19대 국회에 더불어민주당 백재현 의원 등이 발의한 유사한 법안이 제출됐지만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5월 25일 국회 토론회 축사에서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을 할 때”라며 징벌적 손해배상, 입증책임 완화 등에 의향을 내비쳤다. 더불어민주당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을 비롯해 여야 보수 정치인에게 다시 공이 넘어갔다. 반대론자들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반발한다. 재계도 과잉 입법이라며 펄쩍 뛴다. 윤현욱 중소기업중앙회 공제기획실장은 “입증책임 완화나 ‘법률상 추정’은 입법보다는 개별 판례를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반대했다.

정부의 2차 조사까지 확인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만 530명 가운데 146명이 숨졌다. 이런 사건을 딛고 사회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게 숨지거나 고통받고 있는 이에 대한 최소한 도리가 아닐까.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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