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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세상을 향한 삐뚤어진 적개심… 연인-이웃이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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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케이스로 살펴본 한국의 ‘異常 범죄’]

[동아일보]
동아일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우리를 공포에 빠뜨린다. 뚜렷한 이유 없이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거나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는 범인들. 경찰은 그들의 정확한 범죄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범죄행동분석관(프로파일러)을 투입한다.

경찰청이 펴낸 보고서 ‘한국의 이상 범죄 유형 및 특성’은 현직 프로파일러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보고서를 만든 이유다. 이들은 최근 발생한 이상 범죄 46건을 분석해 △묻지 마형 △분노·충동 조절 실패형 △비전형 등 3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그저 같은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았다. 2년 전 해고됐을 때에도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억울했다. 불합리한 세상에서 살 바에는 차라리 교도소가 나을 것 같았다. 2008년 7월 집을 나와 이틀 동안 여관에서 머물던 최모 씨(당시 36세)는 미리 구입해 둔 정글도와 등산용 칼을 신문지로 싼 뒤 품속에 넣었다. 정오가 지나 여관에서 나온 최 씨는 사람이 많은 큰 건물을 찾았다. 시청이 눈에 들어왔다.

시청 1층 민원실은 점심 식사를 막 마치고 돌아온 시청 직원들과 민원인들로 어수선했다. 흉기를 들고 민원실에 들어온 최 씨는 민원창구 뒤편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여직원 2명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 머리와 가슴을 찔린 30대 여직원이 숨졌고 다른 여직원 1명은 손목을 크게 다쳤다.

2008년 동해시청 직원 살인 사건의 가해자 최 씨의 범행은 교도소에 가기 위한 수단이자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경고였다. 프로파일러 앞에서 최 씨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이상 범죄의 유형 중 하나인 ‘묻지 마형 범죄’는 세상에 대한 고립감, 불우한 성장 과정에서 생긴 분노와 적대심, 개인적인 스트레스를 불특정 대상에게 쏟아낸 범죄다. 피해자 대다수는 범죄자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다. 그들은 시한폭탄 같은 범죄자가 범행 욕구를 참지 못한 순간 단지 같은 공간에 있었을 뿐이다.

2011년 5월 밤늦게까지 TV를 보던 A 군(당시 18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TV에서는 아동 학대와 관련된 영상이 방영되고 있었다. 어릴 적 큰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기억이 떠올랐다. 공포와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당시 A 군 옆에는 양봉업자 장모 씨(당시 64세)가 잠을 자고 있었다. 양봉장을 운영하는 장 씨는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온 A 군을 고용한 뒤 함께 숙식을 하며 지냈다.

둘 사이에 불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날따라 A 군의 눈에는 잠자는 장 씨의 뒷모습이 자신을 학대한 큰아버지와 너무도 닮아 보였다. 당한 만큼 되갚아 주고 싶었다. 이성을 잃은 A 군은 망치를 쥐고 장 씨의 머리를 내리쳤다. 신음 소리가 듣기 싫어 휴대전화 충전기 줄로 목을 졸랐다. 이후 정신을 차린 A 군은 갑자기 범행을 멈추고 도주했다. 이틀 뒤 경찰에 붙잡힌 A 군은 범행 동기를 묻는 질문에 장 씨가 큰아버지와 닮아 순간 화가 났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처럼 묻지 마형 범죄의 일부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자신에게 분노와 스트레스를 제공한 대상과 비슷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연인-이웃이 돌변했다

2014년 5월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20분경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 주위를 서성이던 대학생 장모 씨(당시 24세)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검은색 배낭을 멘 장 씨의 손에는 커다란 공구상자가 들려 있었다.

“배관 수리하러 왔습니다.” 중년 부부는 순순히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장 씨는 분노가 치솟았다. 가까스로 분노를 감추고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 공구상자를 내려놓았다. 중년 부부는 장 씨가 배관공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 씨가 집어든 건 래커(락카)였다. 그는 래커를 여성의 얼굴에 뿌린 뒤 미리 준비해 둔 흉기로 찔렀다. 부인의 비명을 듣고 안방으로 뛰어온 남편에게도 흉기와 망치를 휘둘렀다.

이곳은 장 씨의 전 여자친구였던 권모 씨(당시 20세)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피해자는 권 씨의 부모였다. 장 씨는 쓰러진 여성의 휴대전화로 권 씨를 유인했다. 이어 핏자국이 보기 싫다며 숨진 부부 시신에 밀가루를 뿌리고 옆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자정 무렵 귀가한 권 씨를 8시간 동안 감금했다. 뒤늦게 부모님이 숨진 걸 알아차린 권 씨가 비명을 지르자 장 씨는 시끄럽다며 마구 때리고 성폭행했다. 장 씨가 잠든 사이 권 씨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프로파일러를 만난 장 씨는 “전 여자친구 부모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폭발했다”고 털어놨다. 장 씨가 딸을 폭행한 사실을 알게 된 부부가 헤어져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유다. 이후 분노가 차곡차곡 쌓였고 삭이지 못한 분노가 부부를 향했다. 장 씨는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이 같은 분노·충동 조절 실패형 범죄는 보고서에 등장하는 46건의 사례 중 13건에 달한다. 분노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신질환 탓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장 씨 역시 아무런 정신질환이 없었다.

묻지 마형 범죄와 달리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도 특징이다. 2010년 ‘충북 인삼밭 살인 사건’처럼 평범한 이웃이 한순간에 흉악범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박모 씨(당시 52세)는 이웃인 반모 씨(당시 46세)가 자신의 농기구를 만졌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벌이다 콘크리트 벽돌로 내리쳐 살해했다. 평소 피해자가 자신의 전기를 끌어다 써 피해를 주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누적된 분노가 갑자기 폭발한 것이다.

분노의 폭발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2013년 한 20대 여성은 도서관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동갑내기 남성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있다”며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남성의 말을 듣는 순간 억눌려 있던 공격 본능이 살아났다. 이 여성은 남성의 머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교도소가 아닌 치료 감호소에 있다가 출소한 뒤 피해자에게 수십 차례에 걸쳐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5년 전 알코올 의존증이 있던 50대 남성이 집을 나간 아내와 닮았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마주친 30대 여성을 갑자기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엽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가 아파트 화단에 숨져 있어요.”

2011년 7월 18일 새벽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당시 고등학교 3학년 A 군이 여성 노인의 시신을 발견하고 112에 신고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시신의 모습을 보고 A 군을 의심했다. 누군가 시신에 손을 댄 흔적이 역력했다. A 군은 경찰의 추궁에 횡설수설하더니 시신을 성폭행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A 군의 엽기 행각은 프로파일러 면담에서 이유가 밝혀졌다. 집 밖을 배회하던 A 군은 시신을 보고 평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친구들의 폭력과 성추행에 시달리면서 반항도 못 하고 당하기만 하는 자신과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는 시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A 군은 프로파일러에게 “자신을 벌주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비전형 범죄는 살인을 저지른 뒤 시신을 절단하고 훼손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잔혹한 범죄나 시간(屍姦) 등의 범죄를 말한다. 망상으로 인한 범죄도 포함된다.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비전형 범죄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프로파일러는 “이런 범죄자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범행을 저지른 뒤 피해자들이 괴로워하고 놀라는 상황을 즐긴다. 범행 뒤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김호경 whalefisher@donga.com·박훈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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