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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월드리포트] "당신 땜에 하루 장사 종쳤수!!" 서민 총리의 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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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나 중국이나 정치 지도자들에게 민생 현장 시찰이나 행정 현장 점검은 무엇보다 중요한 이벤트입니다. 층층시하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눈과 귀가 가려진 채 탁상 행정과 현실성 없는 담론만 늘어놓다간 대중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입니다.

반대로 저잣거리 쏘다니며 거리낌없이 시장 사람들 손 잡아주며 사는 얘기 들어주는 서민 행보는 대중 지도자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가 됩니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총리란 자리는 한 가정의 어머니와 같아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색 바랜 점퍼에 낡은 운동화 차림으로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이재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경제 분야를 주도하는 게 총리인 만큼 국내외 경제상황 변화나 새로운 경제정책 시행에 맞춰 시장이나 상점을 순시하며 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도 총리의 업무입니다. 신 중국 개국 이후 첫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부터 바로 직전 총리인 원자바오는 물론, 살짝 까칠해 보이는 외모의 리커창까지 예외없이 서민들과의 스킨십을 강조해왔습니다.

리커창 총리가 지난달 25일,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서부대개발의 중추 도시인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를 찾았습니다. 경제성장률 둔화 속에 물가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 지 직접 챙겨보고 싶었던 리 총리는 청두 시내에 있는 이민(益民)시장을 찾았습니다.

정육점에 들른 리 총리가 웃음 띤 얼굴로 주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고기가 좋네요! 장사는 잘 됩니까?"
- 평소에는 잘 되는데 오늘은 1근도 못 팔았습니다.
"아니 왜요?"
- 당신이 오는 바람에 손님들이 시장 안으로 들어오질 못합니다.

정육점 주인의 뚱한 반응에 머쓱해진 리 총리가 대뜸 응수합니다.

"그럼 제가 4근 살게요!"
- 팔 수 없습니다.
"아니 왜요?"
- 당신이 오는 바람에 (고기 자를) 칼까지 죄다 걷어 갔어요.

권력 서열 2위인 총리가 뜨자 경호에 비상이 걸렸고, 청두 공안 당국이 미리 손을 쓴 겁니다. 그 바람에 정육점 주인은 하루 종일 고기 한 근도 못 팔고 쇼윈도의 마네킹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리 총리와 정육점 주인이 만들어낸 이 블랙코미디는 어떤 언론에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리 총리가 부지런히 시장을 누비며 상인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청취했다는 판에 박힌 기사만 나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날 벌어진 해프닝은 SNS를 통해 퍼져나갔습니다.

우직한 정육점 주인에게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리 총리는 다음날 자리를 옮겨 과일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최근 문제가 된 농약덩어리 농산물 실태 등을 점검하겠다며 들른 겁니다.

하지만 정작 누리꾼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리 총리의 모습을 담은 사진 속 좌판 위에 붙어있는 과일 가격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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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와 비파의 가격이 1㎏에 각각 3위안(530원), 3.5위안(620원)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네티즌들은 동그라미가 하나 빠진 것 같다며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고 비아냥댔습니다. 최근 장바구니 물가 급등으로 민감해져 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은 셈입니다.

네티즌들의 분노에 시장 관리회사는 즉각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회사는 "앵두는 1㎏에 30위안이고, 비파는 35위안인데 가격표가 사진 속에 흐릿하게 잡히다보니 괜한 오해를 불러왔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폭로가 이어졌습니다. 총리가 오기 전에 공안들이 시장에 들이닥쳐 현장을 일제히 정리했고 실제 상인들을 다 몰아내고 현지 지방정부 직원들이 과일상점과 채소가게를 차지한 채 상인인 것처럼 연기를 했다는 겁니다. 하루 전날 정육점 사건에 따른 학습효과였던 셈입니다. 이 시장의 단골이라는 네티즌은 "총리가 뜨자 시장의 물건 값이 절반으로 내려갔다"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쇼잉'의 전말을 총리가 미리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만 리커창의 이번 쓰촨 민생 투어는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며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과도한 의전과 연출이 말썽이 된 예는 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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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쓰촨성에 강진이 발생하자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기차를 타고 피해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후 주석이 탄 열차가 도착했을 때 플랫폼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습니다. 지진으로 플랫폼 여기저기에 균열이 생기자 지역 공무원들이 국가주석을 위해 꺼진 곳을 비료 포대로 메우고 그 위에 붉은 양탄자를 깔았던 겁니다.

기차에서 내리려다 붉은 양탄자를 발견한 후 주석이 하차를 거부하고 승무원에게 기차를 더 전진시키도록 한 뒤 양탄자가 없는 곳에 기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불상사를 가까스로 피해갔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 초인 2013년, 택시를 타고 암행 민생 시찰을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베이징의 지독한 스모그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택시 기사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뒷자리 손님이 시 주석임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자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시 주석이 택시 요금 영수증이 '일범풍순(一帆風順· 순풍을 받은 배처럼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뜻)'이라는 글귀까지 써줬다는 미담이 홍콩 대공보에 실렸습니다. 민생을 챙기는 시 주석에 대한 찬사가 쏟아질 무렵 관영 신화통신이 대공보 보도가 허위라며 정정보도에 나서며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한국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민생 현장이나 일선 행정 현장과 접촉하려다 예상치 못한 망신을 당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011년 말 여권의 유력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관할인 남양주소방서 상황실로 119 긴급 전화를 겁니다.

"경기도지사 김문수입니다."
- 예예 무슨 일 때문에요?
"어…내가 도지사인데 이름이 누구요 지금 전화 받은 사람이?"
-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하셨는지 먼저 말씀을 하십시오.
"어...아니 지금 내가 도지사라는데 그게 안 들려요?"
- 소방서 119에 지금 긴급 전화로 하셨잖아요?
"아니 도지사가 누구냐고 이름을 묻는데 답을 안 해?"
- 일반전화로 하셔야지 왜 긴급전화로, 그렇게 얘기를 하시면 안 되죠.
(녹취 내용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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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한 통화 내용은 가감없이 보도됐고 매뉴얼대로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소방공무원은 인사조치가 됐다가 번복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선 소방공무원들의 대민 전화 대응을 점검하고 그들의 노고를 격려하려던 김 지사는 119 긴급 전화로 아랫사람에게 관등성명이나 요구하는 권위주의적 인물로 비쳐졌고, 격의없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순식간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정몽준 의원은 '버스비'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지난 2008년 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정 의원은 버스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한 70원 하나?"라고 대답했다가 역시 '금수저'답다는 혹평을 들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는 지도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덕목입니다. 하지만 진정성이 담보될 때 비로소 세상에 널리 퍼지는 울림이 생겨나는 법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임상범 기자 doongl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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