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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흙 다듬어 불에 굽기까지… 고운 자태의 그릇은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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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물레 성형의 핵심은 힘 조절이다. 손에 힘을 많이 줄수록 도기의 두께는 얇아진다. 아기를 다루듯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만져가며 원하는 모양을 만든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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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문을 열자 흙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빌딩으로 가득한 도심에선 쉽게 맡아볼 수 없는 자연의 향이다. 풀밭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서울 구로동에 있는 '빚다도예공방'이다. 안쪽엔 이제 막 만들어진 물렁물렁한 흙색(色) 컵부터 가마에서 초벌을 끝낸 단단한 황토빛 도자,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진 완성품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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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 성형은 처음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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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창고에는 전기로 된 가마가 놓여 있다. 근처만 가도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공방의 조용현 대표는 "과거엔 사람들이 나무를 넣어 화력으로 도자기를 구웠지만, 불을 붙이고 유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지금은 전기 가마를 많이 사용한다"고 말했다. 물레를 이용해 컵을 만들어봤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컵 두께를 너무 얇게 잡아 한쪽이 허물어졌다. 충분한 시간을 투여하기보단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 생긴 결과였다. 이를 지켜보던 조 대표는 "조급해하지 말고 힐링하는 마음으로 과정을 즐기라"고 조언했다. 울퉁불퉁했던 컵의 표면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니 말끔해졌다.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물레 위에 점토를 올려놓고 회전력을 이용해 둥근 형태의 도자기를 만드는 물레 성형(成形), 가래떡처럼 흙을 빚어 위로 쌓아올리는 흙가래(코일링) 성형, 점토를 판처럼 밀어 직각 작업을 하는 점토판 성형 기법이 있다. 도자를 빚을 때 사용되는 물레 성형은 도예 공방에선 중·고급자 코스에 해당된다. 초보자가 곧바로 하기엔 난도가 높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도예를 체험하기엔 최적이다. 과거엔 발로 물레를 일일이 돌리며 도자를 만들었지만, 요즘엔 페달만 밟으면 저절로 돌아가는 전기 물레를 사용한다.

물레 성형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물레 위 흙 기둥의 중심을 탄탄히 잡아주는 것이다. 물레 위 기둥 모양의 흙 점토를 올려놓고 뻑뻑해지지 않게 물을 적셔가며 여러 번 올리고 내리며 중심을 잡아야 한다. 기둥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아야 중심이 잘 잡힌 것이다. 기둥의 중심을 잡는 과정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지만 몇 번 시행착오를 겪으면 감(感)을 잡게 된다. 중심이 잡혔다면 흙의 중간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넣어 구멍을 만들어 원하는 만큼의 깊이를 만든다. 안정적인 두께와 원하는 만큼의 깊이를 갖춘 도자 모양이 나오면 와이어를 사용해 하단 기둥에서 잘라 분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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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이렇게 만들어져요 - 1.물레로 빚은 그릇을 실온에서 잘 말린 뒤 섭씨750도를 웃도는 가마에 넣고 굽는다. 초벌구이한 도자는 황토빛이 된다. 2.초벌하고 나온 그릇에 유약을 발라 실온에서 잘 말린다. 3.유약을 바른 도자를 다시 섭씨1250도의 뜨거운 가마에 넣고 12시간 정도 다시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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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도자기 모양을 만들었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니다. 실온에서 도자를 건조시킨 뒤 섭씨 850도 가마에서 굽는 초벌을 하고 이를 식혀야 한다. 이후 유약을 입혀 섭씨 1250도에서 다시 굽는 재벌을 해 9시간 정도 식혀야 끝난다. 모든 과정을 거쳐 하나의 도자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주 정도. 단 하나의 과정이라도 빠트리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가마에서 굽는 과정 중 흙의 수분이 날아가 원 크기보다 15~20% 줄어들기 때문에 도자를 빚을 땐 원하는 크기보다 조금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

물레 성형을 하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남녀 주인공이 로맨틱하게 물레를 돌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뒤에서 부둥켜안은 채 물레를 돌리는 일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자칫 다른 생각을 하면 모양이 헝클어지거나 단면에 구멍이 나버리고 만다. 잡념을 버린 채 물레를 돌리고 있으니 무엇 때문에 내 자신을 닦달하며 나날을 지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조급함은 사라지고 차분해진다. 모든 게 빨리 이뤄지는 현대에서 도예는 '느림'과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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