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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찌고 거르기 수십 번… 하얀 빛깔의 '부드러움'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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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쌀을 빚어 만든 원주(原酒)에서 쌀 찌꺼기를 걸러내고 있다. 막 걸러낸 술이라는 의미의 막걸리는 걸러낸 뒤 2주 안에 마셔야 한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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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너머 성권농(우계 성혼) 집에 술 익었다는 말 어제 듣고 /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안장 밑에 까는 담요) 놓아 지즐타고(눌러타고) /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 송강 정철

임금도 못 말렸던 주호(酒豪) 정철(1536~1593)이 술을 마시려고 술집이 아니라 친구 집으로 내달렸던 이유가 있다. 한국의 전통주 문화는 가양주(家釀酒) 문화다. 집집마다 직접 술을 빚었단 뜻이다. 약재나 식물, 꽃향기 등을 첨가한 각자 나름의 개성 있는 술이 한때 700여 종에 이르렀단 기록도 있다.

이런 가양주 문화는 1916년 일제가 공포한 주세령 세칙을 계기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모든 주류를 약주, 탁주, 소주로 획일화하고, 징세 행정 편의를 위해 1개 면에 1개의 양조장 면허만을 내주는 정책을 도입했다. 한국의 근대적인 양조장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 그 당시인 1933년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문을 연 신평양조장은 지금까지 3대를 이어오며 전통주를 빚고 있는 곳이다. 일제의 정책으로 탄생한 곳에서 전통주 문화가 지켜져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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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양조장 김용세 대표가 80년 넘게 쓴 옹기 항아리에 담긴 술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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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죠. 조선 시대엔 정말 집집마다 내려오던 술이 있을 정도로 술 문화가 풍요로웠는데. 우리 양조장은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평양조장 3대째인 김동교(42) 부대표는 "우리 양조장에서 만드는 백련 막걸리는 그런 가양주의 현대판"이라고 했다. 1990년대 2대째인 김용세 대표가 사찰에서 스님들이 연잎으로 차를 만드는 것을 보고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 이 양조장의 대표 상품인 '백련(白蓮) 막걸리'다. 살균과 정화 효과가 있다는 백련을 직접 키워 딴 잎을 넣어 만든 술이다. 백련 막걸리는 2009년 청와대 전시품목 막걸리, 2012년 '대한민국 '우리 술' 품평회' 살균탁주 부문 대상, 2013년 '영국주류품평회(IWSC)' 브론즈 메달 등을 받았고 2014년에는 삼성 사장단 공식 만찬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맛을 인정받았단 뜻이다. 가업을 이어받는 중인 김동교 부대표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양조장 일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이라면 우리 전통주를 빚는 일의 핵심은 정성, 정성, 또 정성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양조장의 시설 하나하나를 둘러보며 전통 술 제조 과정을 설명했다.

"좋은 쌀을 써야 하고 그 쌀로 술을 만들기에 좋은 밥을 제대로 지어야 하죠." 이런 준비 과정은 세미(洗米·쌀 씻기), 침미(沈米·쌀 불리기), 절수(折水·물 빼기)로 나뉜다. 특히 술을 만들기 위해선 쌀알이 탱글탱글한 고두밥을 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밥이 너무 질어지지 않게 절수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 뒤는 증자(蒸煮), 즉 수증기로 쌀을 익히는 과정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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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발효되면서 탄산이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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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입국(入麴)이야말로 전통주 만들기의 핵심이다. 전분질로 이뤄진 쌀에서 당이 만들어지도록 누룩과 효모를 섞는 과정이다. 큰 통에 담은 쌀에 누룩과 효모를 섞은 뒤 48시간 동안 주기적으로 쌀과 누룩, 효모가 고루 섞이게 저어야 한다. 신평양조장에선 지금도 이 과정을 기계를 쓰지 않고 직접 손으로 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기계보다 섬세하게 작업할 수 있기 때문이란 이유지만 중노동이기도 하다. 작업이 진행되는 입국실의 온도는 보통 35도까지 올라간다. 그런 곳에서 한 번 섞을 때마다 1~2시간씩 허리를 숙이고 쉴 새 없이 작업을 하니 중노동일 수밖에.

이렇게 섞은 쌀을 발효 항아리에 나눠 담고 적절한 온도(22~25도)로 냉각시킨 뒤 발효·숙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알코올이 생성된다. 김 부대표는 "술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발효 과정에서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매일의 온도 및 습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날그날 상태에 맞춰 발효실 온도를 조정해야 한다. 보통 발효 과정에서 30도 이상으로 온도가 높아지는데, 그러면 술을 망치게 된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로 술을 망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각종 냉각 장치와 함께 신평양조장에서 의지하는 것은 바로 80년 넘게 쓴 옹기 항아리들이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통에서 발효시키면 옹기 항아리를 쓴 것 같은 맛이 절대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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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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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가 끝난 것을 원주(原酒)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쌀찌꺼기를 걸러내는 여과 및 가수(加水·물 섞기) 과정을 거친다. 흔히 막걸리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막 걸러낸 술이란 뜻이다. "걸러내고 2주 내에 먹어야 하는 게 막걸리죠. 그게 막걸리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백련 막걸리를 보고 있자니 군침이 돌았다. 김 부대표는 사발 대신 작은 잔에 따라 마셔보길 권했다. "그래야 술의 향도 더 잘 음미할 수 있거든요." 그 말을 따랐다. 하얀색 부드러운 술을 작은 잔에 졸졸 따랐다. 한 손으로 살며시 들어 입술에 댔다. 코끝에 올라오는 냄새가 간질간질했다. 향기가 말을 거는 듯한 착각에 서둘러 입술을 열었다. 술이 혀를 한 번 감고 들어와 목구멍으로 굴러들어갔다.

양조장 옆 뒷뜰엔 백련꽃이 한창 피었다. 정철의 절창 '장진주사'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한잔 먹세 그려/또 한잔 먹세 그려/꽃 꺾어 술잔 수를 꽃잎으로 셈하면서 한 없이 먹세 그려." 임금도 그를 말리지 못한 까닭이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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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방식대로 손으로 직접 쌀과 누룩 효모를 고루 섞어주고 있는 모습. 허리를 숙인 채로 1~2시간씩 섞어야 하는 중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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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권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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