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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강남 엄마들의 神 '돼지엄마'들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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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학종시대 新풍속도 <1>

학원 정보력·돈·상위권 자녀 가진 사교육 ‘숨은 실세’

강사도 바꾸던 권력, 학생부 종합전형 대세에 고개 숙여

조선일보

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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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 종합전형, 이른바 '학종시대'다. 현재 고2가 응시하는 2018학년도 입시에서 서울대는 입학 정원의 78.4%를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뽑는다. 서울시내 주요 대학도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뽑는 정원이 절반에 이른다. 학생부 종합전형이란 내신성적뿐 아니라 교내 동아리·봉사·독서 활동에 수상 실적 등 비(非)교과 영역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입학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 수능 성적 위주로 뽑는 정시 모집이 줄고 학생부·면접·논술 등을 중심으로 선발하는 수시 모집이 대세가 되면서 학종은 학교와 학원가, 엄마들 브런치 카페 풍경까지도 바뀌고 있다. 학종시대 신풍속도를 그렸다. 〈편집자 주〉

지난달 25일 오전 11시. 서울 청담동 한 브런치 식당에 40대 여성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예약 손님의 대부분은 청담동, 압구정동 일대에 사는 주부들. 화제가 다양했다. "그 스타 셰프네 맛집은 어떠냐?" "피부과는 어디가 좋으냐" "죽전에 미국 스카이폴을 본떠 만든 트램펄린 파크가 좋다던데"…. 여기까진 애피타이저다. 파스타 접시가 사라지고 커피가 나오자 자녀들 걱정이 시작됐다. "수학이 아니라 국어가 당락을 좌우한다던데?" "소논문도 써야 한다며?" "AI(인공지능) 시대엔 상위 1% 못 들거면 그냥 놀리면서 키우는 게 장땡이래." 의외로 학원 정보, 유명 강사에 관한 '알짜 정보'는 오가지 않았다. "돼지엄마를 아느냐"는 질문에 한 여성은 "돼지엄마가 뭐예요?"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압구정동 엄마가 설명했다. "요즘엔 돼지엄마들 영향 별로 안 받아요. 전형이 워낙 다양해지고 수시, 특히 학생부 종합전형이 대세가 되면서 돼지엄마들 위세가 확 줄었답니다."

굿바이! 돼지엄마

사교육 1번지 강남 학원가를 호령했던 '돼지엄마'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돼지엄마란 학원가 최신 정보와 스타 강사들 명단을 꿰뚫고 있는데다, 자녀가 반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성적이 뛰어나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엄마를 빗댄 은어. 상위권 아이들 대여섯명씩 팀을 짜 유명 강사에게 족집게 수업을 듣는 일을 주도, 다른 엄마들을 새끼 데리고 다니듯 이끈다고 해서 '돼지엄마'란 별명이 붙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돼지엄마의 위세는 대단했다. 팀원 선발권이 돼지엄마에게 있기 때문이다. 돼지엄마에게 팀수업 제안 '콜'을 받았는지 여부가 엄마들 희비를 갈랐다. 콜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 애가 상위권이 아닌 탓이다. 학원가에서 이들이 갖는 파워도 대단했다. 강사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학원 커리큘럼에도 영향을 미친다. 돼지엄마 자녀가 명문대 입학하는 것이 학원의 인지도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서울 청담동 한 브런치 카페. 엄마들 정보 교환 아지트였던 브런치 식당은 예전처럼 북적이지 않는다. / 김민정 기자


팀 짜서 공부할 이유 없다

그러나 학생부 종합전형이 크게 늘면서 돼지엄마들 기세가 꺾였다. 잠원동에 사는 중3 엄마 민가영(가명·43)씨는 "학종이 대세가 됐다는 건, 입시 전략이 개별화된다는 뜻"이라며 "자기소개서부터 독서 리스트 등 내 아이 진로와 개성에 맞는 맞춤형 입시 전략이 필요한 시대라, 오로지 수능(정시)에서의 고득점을 노리며 상위권 팀수업을 주도했던 돼지엄마 역할은 무의미해졌다"고 했다. 잠실 사는 고3 엄마 강현희(50)씨는 "아이마다 공부하는 성향이 다르고 저마다 진로에 따라 쌓아야 할 스펙도 달라지기 때문에 요즘엔 팀수업을 꺼리는 엄마들이 많다"고 했다.

돼지엄마에 대한 스트레스도 원인이다. 수업 스케줄을 자기 아이 위주로 꾸리는데다, 성적이 오르지 않아 빠지고 싶을 때도 N분의 1로 나눠내는 수업료 때문에 마음대로 나올 수 없다. 대치동 사는 고 1엄마 김지은(가명·41)씨는 "휴대전화에 '그분' 전화번호가 뜨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했다. 또 다른 과목으로 팀수업을 꾸리는데 합류 여부를 결정하라는 통보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들어가자니 수업료가 부담되고 안 들어가자니 그룹에서 소외될까 망설여진다는 것. 돼지엄마에 대한 불신도 한몫했다. 일종의 파워블로거처럼 학원과 모종의 커넥션을 가지고 팀을 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족집게? 공부에 왕도 없더라

투자 대비 효과가 별로라는 것도 돼지엄마가 사라지는 이유다. 팀 수업료는 보통 4회에 300만원 정도. 이걸 참가자 머릿수로 나눠 분담하는데 생각보다 실력이 쑥쑥 오르지 않는다는 게 엄마들 얘기다. 민가영씨는 "공부에 왕도가 없다. 고작 1, 2점 올리려고 고액의 과외비를 쏟아넣을 이유가 없더라. 아무리 족집게 선생이라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온전히 내 것이 안 된다는 걸 엄마들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전했다. 청담동 사는 박연주(가명·42)씨는 "돼지엄마들 따라다니다가 성적도 못 올리고 우왕좌왕하다 돈만 낭비했다는 엄마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돼지엄마와 결별한 엄마들은 직접 발품을 판다. 자사고 1학년 딸을 둔 정혜영(가명·43)씨는 학원 설명회 다니느라 일주일이 바쁘다. "내 아이 공부 성향에 맞는 학원과 강사를 찾는 게 중요하니까요." 대치동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둔 임수진(42)씨는 "학종시대에 대비해 학교에서 해주는 입시 관련 강좌들이 많아 돼지엄마의 정보력에 의지할 이유가 없어졌다"며 "요즘 엄마들은 교육에 대한 자기 나름의 소신이 강해서 돼지엄마가 추천한다고 해서 우르르 몰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휘문고 심재준(39) 진로진학상담 교사는 "돼지엄마들이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영향력을 미칠 만한 게 없다"고 했다. "돼지엄마들은 학원, 스타 강사 등 외부에서 교과 관련 정보를 찾아 제공하는 사람들인데, 학생부 종합전형의 핵심은 학교 내에서 이뤄지는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돼지엄마의 활동영역이 오히려 넓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진표 와이즈멘트 대표는 "돼지엄마는 학원에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들이라 자기소개서와 독후감은 어느 학원이 잘 봐주고, 면접은 어느 학원이 잘 봐준다는 식으로 학부모들 귀를 솔깃하게 한다"며 "입시전형이 복잡해질수록, 학교와 가정이 소통이 안 될수록 이들의 입김이 더 커질 수 있다"며 경계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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